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남은 동전 좀 주세요!” 거리에서 구걸을 하던 소년이 한 여인에게 손을 뻗다가 뜻밖에도 눈물을 쏟으며 기도한 얘기가 화제가 됐다. 최근 해외 온라인 매체 인스파이어모어(InspireMore)는 케냐 나이로비 시에 사는 빈민 소년 존 쑤오(John Thuo)가 구걸을 하다 누군가를 만난 사연을 소개했다. 고아나 다름없는 어린 소년 존은 매일 길에서 행인들에게 구걸해 얻은 돈으로 작은 빵 조각을 사서 배를 채웠다.

[2] 얼마 전, 존은 여느 때처럼 구걸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마침 도로 갓길에는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차 안으로 손을 뻗은 존은 무심코 운전석을 바라보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운전석에는 여성이 타고 있었는데, 여성이 휴대용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이름은 글래디스 카만데(Gladys Kamande). 존은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글래디스에게 물었다. “왜 그걸 끼고 있어요?”

[3] 여성은 대답했다. “사고로 폐가 망가졌단다. 나는 이게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단다.” 어린 마음에 지금껏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던 존. 하지만 어려운 사람은 자신 말고도 주변에 존재했다. 존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존은 이어 글래디스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제발 이 분의 병을 낫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4] 또 자기 주머니에 모아두었던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글래디스에게 건넸다. 하루 종일 힘겹게 구걸해 얻은 돈이었지만, 자기보다 몸이 아픈 글래디스에게 더 값지게 쓰이겠다고 생각했다. 글래디스는 “너무 고맙지만 받을 수 없어!”라고 웃으며 거절했다. 두 사람의 이 같은 모습은 지나가던 시민이 포착, 자신의 SNS를 통해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온라인을 통해 빠르게 확산된 존과 글래디스의 사연은 누리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5] 케냐의 한 기부 사이트에는 글래디스의 수술을 위한 모금 운동이 진행됐다. 그 결과 우리나라 돈으로 2억 원이 넘는 돈이 모였고, 글래디스는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이후 글래디스는 새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 존을 찾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잠에서 깨어난 내게 깊은 감동과 기쁨을 주는 기사였다. 그 내용만으로도 좋은 아침(Good Morning)이 시작된 듯하다.

[6] “60이 다 되어가는 이 나이까지도 나는 왜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늘 의문을 갖고 불평조의 질문을 되뇌던 내가 존의 얘기에 망치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학문적으로 영적으로 애들 교육면에선 누구보다 부하지만 물질적으론 그러지 못하다 생각했던 나였다. 유학을 마치고 왔을 때 같이 유학을 했던 선배 교수가 내게 해준 말이 있었다.

[7] “자넨 부자야!” 그래서 “내가 무슨 부자예요? 내 소유의 집도 한 채 없는 걸요!” 했더니, “빚 안지고 유학했으면 부자지!”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았다. 남들은 유학하느라 빚도 많이 졌는데, 우린 부부가 열심히 벌어서 빚 없이 공부를 했으니 부자가 맞더라. 이건 빚지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내와 나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몇 달 전, 미국서 공부하던 둘째 딸이 졸업 후 한국에 와 있다.

[8] 이젠 나머지 세 명도 가을학기에 온라인 수업이라서 한국에 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집이 너무 좁아서 집을 구하러 한 달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집값이 천정부지라 살 수가 없다. 집을 보러 다니다 보면 시험들 때가 종종 있다. 내가 보는 집에 갓난 애기를 안고 있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집을 살 형편에 미치지 못하건만 젊은 저 사람들은 무슨 돈이 많아 이보다 더 넓고 좋은 집을 찾고자 집을 내놨을까?”

[9] 이런 생각이 머리 속에 오고 가자 집을 보러 갈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후배랑 통화하다가 또 마음 속 불평을 토해내고 말았다. “이 나이에 집도 한 채 없으니 자괴감이 심하더라!” 했더니 그 친구가 이리 말한다. “교수님은 유학도 했고, 애들을 네 명이나 키우면서 미국에서 공부시키지 않았나요? 그것만 해도 부잔데 왜 그러세요?” 그 말이 적잖은 위로가 된 게 사실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곧 온다는데 집을 구하려니 아득하기만 하다.

[10] 전세는 물건도 없고, 사는 건 지금이 때가 아닌 것 같고, 여기서 살려니 너무 좁아서 힘들고, 그래서 고민이 많다. 나보다 아내의 짐이 너무 큰 거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존과 글래디스의 얘기는 나를 꽤 많이 부끄럽게 했다. 그런 이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부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들과 비교해야 감사의 마음이 터져 나올 텐데, 나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이들과 비교하는 게 문제다.

[11] 전자 쪽이면 세상 누구든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후자 쪽이면 어떤 이에게 감사가 나올 수 있으랴! 아무리 부해도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 때문에 감사가 아닌 불평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나 역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존이란 소년은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누가 봐도 빈곤층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하루 일당을 몽땅 글래디스에게 털어 줬다. 불가능한 일이다.

[12] 그건 자기보다 더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가 있음을 자각했을 때만이 나올 수 있는 행동이다. ‘상대적 빈곤’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보다 나은 이들에 비해 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야!’란 생각과 ‘세상에 나보다 더 가난한 이도 있구나!’란 생각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언제나 전자 쪽이 아니라 후자 쪽의 생각에 고정되기만 한다면 감사와 너그러움과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거 같다.

[13]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한 달란트 묻어두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주인에게 갖다 준 후 책망과 심판을 선고받은 그 청지기의 문제가 무엇일까? 바로 ‘비교의식’이다. 그 비교 의식이란 것도 두 달란트 받은 청지기처럼 ‘누군 두 달란트 주고 누군 다섯 달란트 주고, 뭐 이런 나쁜 주인이 다 있어!”가 아니라 ‘나보다 덜 받은 이도 있네. 많이 주신 고마운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남겨드려야지!’라는 식으로만 전개된다면 얼마 좋을까?

[14] 감사를 자아내는 ‘비교의식’ 말이다. 오늘 난 존과 글래디스의 얘기를 통해 물질적으로도 내가 꽤 큰 부자임을 깨달았다. 삭개오처럼 회개와 실천은 즉각적이어야 한다. 수해를 당한 친구 목사님에게 얼마라도 전해드려야겠다 생각했지만 여태 행동에 옮기질 못했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방금 아내에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OOO 목사님에게 지금 돈 좀 보내드려!”라고 말이다.

[15] 존과 글래디스 덕에 평소 생각한 액수의 배나 보내게 됐다. 행복한 마음 한 가득이다.

“야호!” 존과 글래디스가 억수로 고맙게 생각되는 특별한 나의 하루가 지금부터 시작이다.

“주께 감사!”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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