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한계를 가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거나 어떤 틀에 맞추어 정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인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량 밖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겸허하게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르게 무신론자들이 가지는 불가지론적인 이성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우월한 가치로 인정하는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철학적 사변의 대상으로만 간주할 때는 완전주의에 기반한 무기력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이는 이성만을 맹신하는 미혹과 교만의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속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나는 어떤 별에 살고 있는 얼굴이 시뻘건 양반 하나를 알고 있어. 그는 꽃 향기를 맡아본 일도 없고, 더하기밖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어. 온종일 아저씨처럼, 나는 착실한 사람이다, 나는 착실한 사람이다, 하고 되뇌이고 있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잔뜩 교만을 부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야. 그건 버섯이야!"

역사상 수 없이 많은 예술적 사상적 엘리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불행한 인생을 마감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체질과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당신을 계시하셨고 또 알 수 있게 하셨다.

구약에서는 창조와 외적으로 행하시는 관계 안에서, 신약에서는 가장 완전한 계시의 양식인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보이시고 또 인간을 찾아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그의 삶(Act)과 말씀(Word)으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되셨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가 되시는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7-9)"하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한 자신을 알리실때 요구하시는 것은 앎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으니 바로 이성을 초월한 믿음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만 아는 '무엇에 관한 지식'을 뜻하지 않는다. 구원사적으로 영생이 보장된 앎이며, 가슴이 동반된 전 인격적으로 체험된 앎을 말한다.

하나님 편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믿는 것을 뜻한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0-11)"

의심하는 도마에게 부활 후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고 말씀하셨다.

현재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최대한 만족스런 방법은 성령의 영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미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고 밝히 알려 주셨다.

특별한 경우엔 성경을 읽다가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는 실재가 되어 시공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의 역사를 체험할 때도 있다. 성경의 말씀은 죽은 문자나 의사 전달 매체의 하나가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살아있는 생명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이와 같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며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고 계속 진보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시고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옘33:2)의 역사와도 동행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엡4:13)"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성경 속 인물들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주님을 이모저모로 점점 알아가게 된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아1:7)"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빨리...오는구나(2:8)"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2:10)"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경험의 대상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만 삼는다면 우리에겐 메마름과 공허와 회의만이 남게 될 것이다.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은 친구의 목소리가 어떠하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를 수집하느냐?' 라고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는 몇이냐? 형제는 몇이냐? 몸무게는 얼마냐? 그 친구 아버지는 얼마를 버느냐?' 하는 것이 고작 묻는 말이다. 그래야 그 친구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곱고 고운 붉은 별돌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생각해 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하나님께선 우리가 이성이나 지혜로 하나님 알기를 포기하고, 우리의 한계와 무지를 인정하고, 오로지 맹목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만을 의지할 대상으로 기댈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알게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욥은 극심한 고난 속 회개 중에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이 부숴지고 깨어질때 더욱 우리의 영안을 밝히 열어 주신다.

참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바 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너무도 감격스런 축복이며 감사이다!

우리가 자신을 비우고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 한다는 점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되고, 한편 은혜와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어린 왕자는 말한다:

"'누가 양을 가지고 싶어하면 그것은 그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라고 어른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어깨를 들먹이며 우리를 아이로 취급할 것이다...어른들은 그렇게 되어 먹었다. 그것을 가지고 어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못 쓴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대해서 아주 너그러워야 한다."

그렇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순수한 어린이들로서 세상의 다른 많은 것들을 의지하는 어른들에 대해 좀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품고 가까이 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자: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싶어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고…

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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