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노
▲푸른교회 조성노 담임목사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상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율법학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논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상상은 갑니다. 귀신 들린 한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게 약점이 되어 잔뜩 수세에 몰린 채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거겠죠. 그런데 바로 그때 주님이 등장하셨으니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기대가 컸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냉담하게 <그들과 무엇을 논쟁하느냐>(막 9:16)며 물으셨고, 제자들의 편을 들기는커녕 <이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너희를 얼마나 더 참으리요>(막 9:19)하고 질타하시며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자체를 아예 해소해 버리심으로써 사태를 신속히 <본래의 문제>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정작 귀신에게 붙잡힌 소년의 고통은 모두의 관심에서 밀려나 있었고 제자들과 율법학자들 간의 논쟁만이 이슈가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하시며 그 사태를 다시금 환원시키신 겁니다. 이를테면 제자들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을 통쾌하게 승리로 이끄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면 주님은 귀신 들린 아이를 한시라도 빨리 구해내는 게 일차적인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받고 있는 소년을 그 사건의 중심인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소년의 고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벌어지고 있었던 <논쟁의 기만성>에 분노하시며 논쟁에서 이기고 짐이 문제가 아니라 과연 <생명을 살릴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도전에 제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세우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화두는 첨예하고 논쟁의 능력은 갈수록 세련되고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능력은 점점 더 빈곤해져 가고 있는 현실이 현대 교회요 현대 사회의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묻고 계십니다. <고통 받고 있는 소년은 어디다 두고 지금 너희는 무슨 주제로 그토록 침 튀기며 논쟁하고 있느냐? 귀신에게 붙잡힌 처절한 소년의 현실을 외면하고 입으로만 공허하게 떠드는 것은 진정한 믿음도, 사랑도 아니다. 당장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라!>

어제가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직도 9명의 아이들이 물속 깊이 갇혀 있는데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양편으로 갈라져 서로 공허한 논쟁만 일삼았습니다. 교회와 사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서로 논쟁하며 딴전을 부리는 동안 아이들의 부모는 주님께로 달려가 지금도 울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들에게 내 아이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서로 논쟁만 벌였지 물속 저희 아이들을 건져내 주지는 못하더이다!>하며 주님께 우리 모두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참 시간이 빠르게 그리고 속절없이 흘러 그동안 내 일처럼 아파하며 함께 슬퍼해 주던 사람들도 이제는 다 어디론가 세월처럼 흘러가 버리고 만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을 발동합시다. 건성으로 시늉만 내지 말고, 가식으로 그럴듯한 표정만 짓지 말고 아이들 부모의 아픔을 정말 내 아픔처럼 여기며 간절히 기도합시다. 하루라도 빨리 물속 아이들을 건져내도록, 모든 의문들과 진상들을 속시원하게 밝히도록 온 힘을 모읍시다.

아, 숨쉬기도 미안한 잔인한 사월.

/노나라의 별이 보내는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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