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기독일보=이선규 편집위원] 사람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이 복인지 모릅니다.

내일 갑자기 죽게 될 사람이 미리 그것을 안다면 얼마나 겁이 나겠습니까?

내일이 오기 전에 미리 겁을 먹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앞에 전개 될 일에 대해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일도 있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후배 목회자가 중국으로 단기 선교를 떠났다가 갔다가 교통사고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간 편에 볼 때는 애석한 일이지만 죽음은 하나님의 권한 있는 것이기에 저주가 아니라 축복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도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러한 상황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언 27:1>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 하지 마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 날 런지 네가 알 수 없음 이니라.”

죽음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제일 많이 후회하는 것은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 한 것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기내에서 생긴 일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리게 되자. 승객들의 행동이 들어 나는데 어떤 승객은 자기가 믿는 신을 부르며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가 하면 이대로 죽는 것이 억울하고 분통해서 우는 사람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성도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 저희 생애에 만족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했나이다. 이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 가기 원합니다’하고 기도 하더랍니다.

만일 우리가 내일 내가 죽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당장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제인가는 반드시 그때가 오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오늘 아침 해가 떠 오른 것은 어제와 같은 해가 아니라. 오늘에 새로운 삶을 살라고 은혜의 햇빛을 비추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 할 때 우리의 삶의 의미는 확연하게 달라 질 것입니다.

죽음을 어둡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삶의 한 과정에 불과 합니다. 사는 즐거움이 삶의 한 과정 이라면 죽음도 삶의 연속선상에서 이해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삶의 목적이 분명 해야 합니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이곳에 보내셨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고 사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이 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너무 힘들면 빨리 이 순간이 지나기를 고대하지만 시간은 마냥 더딜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결되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어릴 때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망각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치유 되지만 현재의 이 순간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그러한 어려운 과정도 지나가게 됩니다.

<히브리서 3: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야고보서 4;13~14>에도,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느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와 같은 인생인데 좀 더 가지려고 좀 더 누리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오늘의 기득권층들은 소유에 연연해 있을까요?

주님의 성탄이 다가옵니다.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야가 탄생하신 성탄의 의미는 실종되고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소휘황 찬란한 추리와 요란한 귀를 자극하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언제나 성탄의 참 의미를 제대로 되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잠을 설칩니다. 속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때가 가까 운줄 알라고 하셨는데 이제 거룩한 것은 숨겨지고 속된 것들이 설치는 것을 보니 바로 지금이야 말로 때가 찬 것 같이 보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이제 낡은 질서는 지나가고 지금까지 지배해온 낡은 질서에 끝장을 선고하는 선고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낡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로 들려옵니다. 금년 성탄절은 이 새로운 질서에 동참하는 성탄절이었으면 하는 소원으로 벅차오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고 그 나무에 무화가 나무가 열렸나 하고 가보았지만 열매가 하 나도 없았다”고 합니다.

주인은 실망한 나머지 ‘혹시 열매를 딸 수 있을까?’하고 벌써 3년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 이에 찍어 버리리라
.
포도원 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베어 버리십시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땅만 허비한 것 같은 생각에 또 한해를 보내는가 하는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때가 차기 전에 나의 삶의 열매를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때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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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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