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사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사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본문은 자신들의 소망이 끊어 졌다고 낙심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과 그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 게 임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 하여야 합니까? 인간은 유한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을 의지하면 실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은 한 순간에 국한 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큰 축복인 것입니다.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를 앙망하지 아니하고 땅의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으니 결국에 가서는 낙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두더지처럼 땅을 뒤지며 돌아가니 거기서 무엇을 얻었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생활이 어떻게 하면 올라가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 비행기가 하늘을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땅에서 이륙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수 믿은 이후 어디에서 떠나본 생활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우리도 이 과정이 필요 합니다. 떠나도 확실 하게 떠나야 합니다. 애매모호하게 떠나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12:1에서 "얽매이기 쉬운 것과 거리끼는 것을 다 끓어 버리고 경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의미는 땅속에 우리 모두의 지체를 못 박아 장사 지낸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의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 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육체의 소욕이 얼마나 가득합니까?

육체의 소욕은 줄어들 줄을 모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 스립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게 되면 올라가는 생활은 불가능 합니다. 때로는 인간의 정이 영적 상승의 생활을 방해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하겠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극구 반대 했습니다. 그것은 육정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육정이 나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으려고 해도 단호히 끊고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 하신 전능하신 창조주 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땅에 것만 바라보는 자들을 향하여 주께서 말씀 하십니다.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주의 존재 근원 이십니다. 만물의 조성자시요 주권자 이십니다. 그의 능력으로 우리가 지음을 받았고 그의 은총으로 우리는 죄에서 용서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다 보면 산에 오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고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힘들지만 기쁨으로 오릅니다. 어떤 이는 부축을 받아 가면서 오르는 분도 있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감수하는 것은 산에 오르는 자는 건강해 집니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기분이 상쾌해 집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높은 경지에 오르는 분은 영혼의 병이 치료받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게 됩니다.

둘째, 올라가는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힘이 필요 하지만 힘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능력이 절대 필요합니다. 비행기 자체에는 힘이 없습니다. 제트 엔진의 힘이 필요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엔진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자기 체험이나 자기 수양으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올라가는 것 같으나 금방 주저 않고 맙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심는다는 말은 힘입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세상만사는 힘과 힘의 대결 입니다. 결국 힘의 문제입니다.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돈의 힘이나 권력의 힘도 필요 합니다. 구약의 삼손은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힘을 받을 때 그는 당 나귀 턱뼈로 불레셋 적군을 천명이나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잃고 자기 힘만 의지 할을 때는 불레셋 사람들에 의해 꼼짝 없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만이 힘의 근원과 연결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달음박질 하여도 피곤치 아니 하며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피곤하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영혼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모두가 귀찮고 흥미를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믿는다는 성도 들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위를 보지 않고 땅에 것에만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를 바라보는 것은 중요 합니다.

위를 보면 무엇이 보입니까? 천국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고 영광이 보이고 주님이 우편에 않아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염려 근심 걱정이 물러갑니다. 우울증이 사라집니다. 원망, 불평, 시기가 물러갑니다.

가장 잘 나는 독수리는 동서남북 사해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현실 세계를 내려다보세요. 세상 사람들의 경쟁과 다툼이 한낮 아이들의 소꿉장난에 불과 해 보입니다. 인간의 미움과 시기가 우수 워 보입니다.

세상이 매우 작습니다. 모든 것이 물거품 같이 보입니다.

전에 충남 보령에 있는 화학 공장을 돌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마 어마한 공장 시설을 돌아보면서 그대 앞에만 서면 난 왜 이렇게 작아지는가 하던 어 디서 듣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안내하던 분이 거대한 크레인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바로 '골리앗'이라고 부른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골리앗은 아무리 커도 골리앗입니다. 다윗은 아무리 작아도 다윗이라고 그렇습니다. 돌은 아무리 커 보여도 돌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아무리 작아도 다이아몬드인 겁니다.

마찬 가지로 바벨론은 아무리 커 보여도 바벨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 받지 못한 이방 민족일 뿐입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아무리 작고 형편없이 보여도 그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 받은 선민입니다. 유대인 들은 'chosen peaple'이라는 말만 들어도 전율했다고 합니다.

'너는 선민이야. 선민이야. 선민이라니까?'하는 이 선민의식이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자기 정체성이 있고 유대인들의 불멸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이덴티티가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선택 했다는 선민의식에 있다면 우리 성도들 의 아이덴티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당신의 자녀 삼으셨다는 자녀 의식에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 의식이 분명 하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시련과 역경을 당하더라도 세상을 능히 이기며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위로 올라가는 생활은 전투에 전진하는 생활입니다.

성도의 싸움은 이미 진행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권세 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휴전이나 정전은 없습니다. 저편에서 그것을 제의해 오지 않는데 나 혼자 좀 쉬자 그만 두자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벌서 패배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일하고 있는가? 휴전하고 있는가? 싸우고 있는가? 우리는 지구력이 필요 합니다 좀 하다 중단하고 가다가 쉬고 하면 누가 승리를 보장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출발은 기쁘게 했지만 오늘은 느리고 무력해져 있지 않습니까? 결승점의 테 푸를 끊기까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하여 덜려 갑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 저들이 "저 앞에 가나안 복지가 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다. "거기를 가야 산다."하면서 가나안에 대한 희망과 환상이 떠올라서 그들의 발걸음이 한 결 경쾌하였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길을 어찌 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나가는 길에 희망이 있습니다. 모든 약속된 축복 신랑 예수님과의 혼인 의 약속 저 천국 가나안의 행복 그것은 우리 앞에 있는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에 부디 쳐 답답할 때는 구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시고 해결해 주 시기로 약속하신 그 약속을 붙들고 나가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장정이라도 넘어지되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니라. 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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