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시드선교회 연구실장)

[기독일보=손상웅 목사] 1928년 창립한 장로교 전국여전도회는 하나님께 감사하여 중국에 여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고, 1930년 장로교 총회는 전국 여전도회의 결의를 기쁘게 받아 중국 산동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선교구조 (여전도회) 와 회중구조 (총회) 라는 풀러신학교 선교역사 교수 폴 피어슨의 이론을 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교 역사학적 의미가 크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 선발 조건으로 중등 이상의 학교와 성경 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하고 현재 교역에 종사하는 만 25세에서 만 30세의 여성 장로교인으로 규정하였다는 데서 '충분한 성경 지식'과 '사역 경험'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한 것은 매우 돋보이는 부분이다.

중국선교사로 선발된 만 28세의 김순호는 타문화 여선교사 제1호라는 명예를 얻었다. 김순호는 1902년 5월 15일 황해도 재령 동북 교회 김두한 장로의 딸로 태어나 재령 명신보통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횡번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와 함북 선진 보신여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재령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1931년 9월 11일 금강산 수양관에서 제4회 조선 여전도회 연합대회 총회 마지막날에 김순호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린 후 전국여전도회는 사례비와 어학비로 600원 그리고 여비로 30원을 지불하였다. 어학비를 지불한 전국 여전도회나, 선교지의 첫 3년을 어학공부에 투자한 김순호는 오늘날 "빨리 빨리" 선교로 언어연수를 뒷전으로 두는 선교사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없다. 김순호가 북경어에 능했다는 마지막 산동선교사였던 방지일목사의 회고는 언어연수의 중요성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순호의 실제 선교는 1934년부터의 팀선교다. 동료 선교사가 개척해 둔 17교회를 순방하면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성경 공부반을 인도하는 등 복음선교에 역점을 두었고, 특별히 여성선교에 힘을 쏟았다. 1936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김순호는 6개월간 전국 교회를 순방하며 산동선교를 보고하는가 하면, 산동 성경 학교 건축을 위한 건축비를 모금하기도 하였다. 산동선교 보고를 접한 모든 교회는 그녀의 선교정신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뜻에서 매년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 주일>로 결의하고 전국 교회가 지켰다면 김순호는 든든한 후원교회와 중보기도팀을 확보한 셈이다. 중일전쟁이 종료된 후 1938년 10월에 시작된 김순호의 2기 사역은 청도에 거주하면서 산동선교를 펼쳤는데 1939년 여전도회 총회의 소환 결정이 있기 6년간이다.

이후 김순호에게 4년 간의 만주사역이 열렸다. 김순호의 3기 사역은 1939년 만주국 쌍향에서의 최혁주목사와의 팀사역이었다. 김순호는 만주 부녀자를 대상으로 성경 공부반을 개설하여 성경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부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함으로 계몽에도 힘썼다. 1941년에는 동반 지방교회 전도부 총무를 역임하는 등 그녀의 선교사역은 기관선교에 까지 뻗쳤다. 김순호의 마지막 사역인 4기 사역은 1942년 9월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여전도회 연합 대회에서 만주국 선교사를 사면하면서 1년간 자비량으로 3기사역을 이어갔다.

귀국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는가 하면 평양신학교에 출강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던 김순호는 무엇보다도 회개를 강조하였는데 오늘날 회개없는 복음에 경고가 되고 있다. 한국동란 중인 1951년,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키던 그녀는 51세로 공산 당원에 의해 순교하면서 중국인이 기억하던 '김고랑'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했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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