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교회는 장벽 희생자들을 기리고 분단의 아픔과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베를린의 명소가 됐다.   ©화해교회 웹사이트

지난 7일 독일 베를린을 출발한 평화열차 참가자들은 8일 정오 베를린 베르나워 거리에 있는 화해교회(Chapel of Reconciliation)에 방문했다.

화해교회는 동베를린을 탈출하려다 희생된 137명의 사진과 이름을 한곳에 전시하고 그들을 추모하는 예배를 매일 정오에 드리고 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에 의해 동서로 분단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장벽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동하는 피난민들이  날로 늘어갔다.

그해 10월 21일 대한뉴스는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서독으로 넘어가는 동독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동독 당국은 연막탄을 던지고 소방차까지 동원해 호수로 물을 뿌리지만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며 '자유를 찾기 위해 건물에서 뛰어 내린 노인', '철조망에 옷을 찢겨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넘어오는 동독인들','경계수비를 강화하는 보초소병들','촬영을 방해하는 소련군' 등의 장면을 보도했다.

동독에서 탈출하려던 수백명에게 국경 경비대가 조준 사격을 가한 동서 베를린 장벽의 중간 지대인 소위 '죽음의 띠(death strip)' 자리. 다시 세워진 화해교회는 베를린 장벽의 소위 '죽음의 띠' 자리에 세워졌다.   ©위키피디아

장벽이 세워진 1961년 8월 13일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하는 베르나워 거리의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은 하나 둘씩 창문에서 베르나워 거리로 뛰어내렸다. 베르나워 거리부터 서베를린이었기 때문이다.

서베를린의 소방수들은 큰 담요로 안전망을 만들어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 내리는 동독 사람들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탈출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창밖으로 몸을 던지려는 찰나에 동독 경찰관의 손에 붙잡혔다가 놓여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지만 루돌프 우르반(Rudolf Urban)은 창문에서 뛰어 내리다 부상당해 숨졌다. 그는 첫 희생자였다.

이외에도 이다 지크만(59,Ida Siekmann), 올가 제글러(80, Olga Segler) 등 밑에 쳐놓은 안전망 밖으로 떨어져 추락사한 사람들, 빨랫줄을 탈출하려다 경비병의 총에 맞아 죽은 베른트 륀저(22,Bernd Linser) 등 희생자들은 137명에 이른다.

동독 정부는 결국 베르나워 거리로 난 창문을 모두 막고, 주민들을 쫓아냈으며, 아파트를 철거했다.

화해교회는1884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화해를 바라며 독일 여왕이 세운 교회였지만, 1945년 베를린이 분열됐을 때 본당 역시 분리되며 출입이 불가능해졌다.

베를린 장벽은 바로 교회 앞을 통과해 교회는 동베를린이나 서베를린 양쪽 다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 중앙에 있었고, 교회 바로 앞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 탓에 동독 당국은 군인을 보내 신자들이 얼씬도 못하게 했고,1961년부터 접근이 금지됐다.

그러다 화해교회는 1985년 동독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으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1999년 다시 착공돼 2000년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진 역사적인 날에 다시 개관해 첫 예배를 드리게 됐다.

한편, 이날 평화열차 참가자들은 현지 성도들과 함께 1962년 10월 8일 죽은 '안톤 발처'(60)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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