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칼리지 진화론
노휘성 소장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 새번역)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계시’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뜻을 전하는 통로로 사람을 사용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그 삶 자체가 하나님과의 교제였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인류에게 전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시는 방식 외의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과 세계를 알아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세상을 어떻게 지으셨는지,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아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신 계시뿐입니다. 우리가 위를 향해 더듬어 올라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래로 내려와 건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앎에는 한 가지 원칙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계시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계시 의존적 인간론’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도, 경험도, 시대의 상식도 계시 위에 앉을 수 없습니다. 계시가 재판석에 앉고 나머지는 그 앞에 서는 것, 이것이 성경을 대하는 신앙의 기본자세입니다.

이 원칙은 성경의 ‘내용’뿐 아니라 성경의 ‘기원’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토라)를 가리켜 “모세의 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오경 자체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기록하게 하셨음을 여러 번 증언합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출 24:4),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기록하기를 마치고”(신 31:24),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을 명하신 장면들(출 17:14; 34:27)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신학자나 성도가 모세오경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다윗 시대에 기록·편집되었다거나, 페르시아 시대 포로 귀환기에 짜맞춰진 것이라는 가설에 동의한다면, 그들은 정말 계시의존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조용히 물어야 합니다. 그 판단의 재판석에는 누가 앉아 있습니까? 성경과 그리스도의 증언입니까, 아니면 그 증언을 검열하는 인간의 이성입니까?

오해는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문 자체를 정죄하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자리’입니다. 계시의 증언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빛 아래서 묻는 것과, 계시의 증언을 인간 이성의 법정에 세워 놓고 그 판결을 기다리는 것은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후자는 계시에 입각한 사고가 아니라, 이성을 계시의 심판자로 앉히는 인본주의적 접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한 시대 전체가 호흡한 공기였습니다.

누가 재판석에 앉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근대(modern)’라는 시대는 흔히 ‘계몽주의’ 시대라고 불립니다. 계시에서 벗어나 이성이 모든 지식의 기반이어야 함에 눈을 떴다는 뜻입니다. 그때부터 지성은 계시에 복종하기보다 계시를 이성 아래 두기를 원했고, 그것이 보편적인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의 물음이 다시 살아납니다. 성경의 기원을 재구성하는 여러 이론들의 밑바닥에는 초자연적 계시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하는 이 시대정신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론이 증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제가 이미 결론을 정해 둔 셈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이성 속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계획은 무엇인지, 나는 그분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를 본능처럼 새겨 놓으셨다면(이른바 ‘본유관념’), 모든 사람은 숨 쉬듯 하나님을 알고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물론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흔적을 완전히 감추지는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창조 세계와 양심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드러나 있다고 말합니다(롬 1:19–20; 2:15). 그러나 그 일반적인 흔적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구원에 이르도록 아는 지식만큼은 우리 이성에 자동으로 심어 두는 방식으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말씀하시고, 여러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해 주시고, 마침내 사람의 몸으로 오시는(요 1:14) 특별 계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유는 관계의 본질에 있습니다. 미리 프로그래밍된 반응은 사랑이 아닙니다. 버튼을 누르면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도록 만들어진 기계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이 우리 안에 경배의 반사작용을 심어 두셨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자동화일 뿐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도 '엄마 아빠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이 신경에 새겨진 반사가 아니라, 참된 사귐 속에서 우러나는 신뢰입니다. 사랑도 믿음도 자유로이 드릴 수 있을 때에만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지 않으시고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프로토콜을 새겨 놓고 조작하시는 분이 아니라, 계시를 인식할 수 있고 계시에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자율적 인격으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기로 작정하신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을 '계시'로 알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자유'와 '믿음'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단순한 정보 전달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하나님과 세상의 궁극을 알 수 있고(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 믿음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계시 → 믿음 → 순종’으로 이어지는 이 순종은 본능적이거나 기계적이거나 즉흥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율과 권리와 책임을 동반한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계시의 말씀은 머리로만 이해되는 지식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통해 삶으로 경험되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 속에서 단련될 때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만약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섬겨야 하며 어떻게 영생을 얻는지가 처음부터 이성에 각인되어 있었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기계적이고 프로그램적인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모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초월의 하나님 ‘엘로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독립된 인격으로 상대하시고 우리를 ‘언약’의 상대로 삼으시는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흥미롭게도 어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 두 이름(엘로힘·야훼)이 서로 다른 저자의 흔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두 이름은 본문을 쪼개는 이음매가 아니라, 오히려 한 분 하나님의 두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 위에 뛰어나신 창조주가 동시에 나 한 사람과 이름을 걸고 언약을 맺으시는 분이라는 것, 바로 이 사실이 ‘왜 하나님이 계시로 자신을 알리셨는가’라는 물음의 답이기도 합니다.

초월자로 머무셨다면 굳이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은 상대와 인격으로 마주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격은 명령어로 조종되지 않고, 말 건넴에 자유로이 응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셨고,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지금도 성령을 통해 계시를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몫은 그 계시 앞에 이성을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멘" 하고 삶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창조주와 나눌 수 있는 가장 인격적인 사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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