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1.
18세기,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서 신학도 전공했지만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치 않았던 레싱은, 루터의 종교개혁 후 진행된 기독교의 경직적 교리화를 비판하면서 나름 “살아있는 기독교 정신(?)”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그에게 요한 복음서는 4 복음서중 매우 매력적이고 중요했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다는 요한복음 1장의 역설은 하나님을 한 분뿐만 아니라 여럿으로 생각하는 가능성, 즉 합리적인 범신론의 가능성과 관련된 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범신론의 주제는 ‘하나이자 전체’이고 ‘분리’가 아닌 ‘연합’이므로 이들에게 ‘총체적 조화’니 우주적-‘조화’나 ‘사랑’이나 ‘통합’이니 하는 표현들은 필연적인 애용어가 되겠다.

‘십자가 신앙’이 부재한고로 정통 기독교에 염증을 느낀나머지, 신의 초월성과 인격성을 부인하는 스피노자에게 기울어진 레싱에게, 요한복음에서 드러난 예수는 아버지의 동일한 형상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가장 크고 위대한 조화’인 것이다.

성령 또한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harmony)로 정의된다면, 레싱의 관점에서 볼때. 신격(Godhead) 안에서야 말로 가장 완전하게 다양함 가운데의 통합(unity in diversity)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씀 안에서의 ‘성령의 임재’가 부재한 합리주의자들에게 이 ‘조화’의 개념은 총체적이고 우주적인 - 범신론적 ‘조화’로 확장되어 나갔고 결국 예수의 신성 또한‘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신성으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횔덜린니체고흐1부 P. 412)

자유주의 신학의 우산을 쓴 범신론,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가 이와 맥을 같아 한다.

이들이 배척하는 것은 분리와 혐오를 낳는다고 주장하는 신적 ‘권위와 질서’이고, 이들이 선호하는 것은 무분별한 평등을 빙자한 ‘포용과 평화’이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선 십자가를 통해 평화를 이루셨지만, 이들은 ‘말씀’ 없는 평등를 통해 그릇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2.
창세기 17장의 아브람의 부름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해석한다.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라는 부름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은 처음부터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과 분리되는 – 즉 그가 ‘신성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부정하는 형태를 취한다고 말이다. (‘신성’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이 열려있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이다: 횔니고1부 P.140,151)

헤겔에 따르면, ‘통일’된 존재의 느낌을 주던 자연속의 신들(우상)과 모든 관계를 단절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야훼)을 따르게 된 후, 그는 자연에 대해 이전의 친밀감 대신 두려움을 느낀고로 외부에 있는 신을 찾게 됨에 따라 그의 ‘보호자’로서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헤겔이 말하려는 것은, 자연신과의 ‘조화로운 연합’을 떠나 인격신인 야훼 하나님과 연합한 아브라함은 지배와 노예적 ‘복종관계’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종교는 생명을 약화시켜 생명력이 없는 종교이기에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이나 예수에게 영적인 생명을 줄 수가 없었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레싱이나 헤겔이나 슐라이어마허나 그토록 갈구했던 것은 ‘생명력’이 넘치는 종교였던 것이다!(횔니고P.164)

그렇다! 아무리 출중난 이성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존전에 자신의 이성을 완전히 내려놓고 두렵고 경건한 마음으로 말씀에 올인하지 못하면, 말씀이 속속들이 심령에 스며들거나 깨달아지지 않기에, 헤겔처럼 자신의 사변적인 이성 작용에 따라 미혹된 영에 이끌려 엉뚱한 해석의 다른 복음을 전하고마는 것이다.

실로, 헤겔이 몰랐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연합이란,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각인 안에 내주하신 하나님/주님의 영인 성령과의 친밀한 연합이자, 교회 공동체 내 “한 성령” 안에서 “한 소망”으로 부르심을 입은(엡4:4) 신자들의 일치와 연합(unity in diversity)이란 사실이었다.

3.
끝으로, 최근에 기독일보에 실린 오순절 신학포럼 기사중 임성욱 박사의 ‘갈등의 세상 하나됨의 신학 고별기도(요 17:1~26) 해석과 함의’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인용 기사 밑에 피력해보고자 한다.

-“하나 됨의 신학은 1세기 초 기독교 특히 요한 공동체가 주류 유대 사회와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내부 연대를 강조하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신학적 언어였다”

‘하나됨의 신학(?)’이라 칭한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마무리 기도는 당시의 정치적 박해에서 공동체를 생존시키기 위한 조직적 차원의 연대나 신학적 언어가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바로 앞둔 상황에서, 주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님이 받으실 영광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처럼 주님의 제자들의 연합과 세상의 악으로부터의 보호,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동일한 연합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신 내용으로서 실로, 시대를 초월한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적 영성의 정수인 것이다

-“말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의 원칙을 21세기의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문맥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 있다”며 “그러므로 고별기도를 평가하기에 앞서 기원후 1세기의 초기 기독교 특히 요한 공동체와 현대 기독교 사이에는 중요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가를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의 고별기도는 초기 기독교의 원칙이나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말씀은 시대적이고 정치적인 간극을 초월한 영생의 진리이다. 요한복음 전승에 대한 고대 기독교 전통에 비판적인 본문 통찰력을 제공했다는 동양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솔로몬 카이사르 말란의 지적이 과연 타당한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별기도의 하나 됨의 신학은 현대 사회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한다”며 “과거에 요한 공동체는 주류 사회로부터 핍박받는 소수 종교 공동체로 존재했지만, 현대 특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라 주류의 위치에서 하나 됨의 신학을 검토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됨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깊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깨달아 삶 속에 적용하려 노력하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본분이고 참된 신앙적 자세이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 이성의 눈으로만 말씀을 읽은 레싱이나 헤겔, 슐라이어마허같은 계몽주의자나 종교철학자들 처럼 ‘하나됨의 신학’을 ‘재구성’이나 ‘검토’의 대상으로 운운하는 것은 심히 염려스럽고 개탄스런 일이다.

-“첫째 과거 요한 공동체가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과의 단절 속에서 내부의 통합과 단결을 추구했다면 현대 기독교 공동체는 세상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6-10).

교회는 요한공동체나 지금이나 북한 공산주의 체재처럼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과 단절한 상태에서 내부 결속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가르침처럼, 뱀같이 지혜로운 지략과 비둘기같이 순결한 말씀의 지조를 지키며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기도로 인본주의의 영을 대적하며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그리스도의 군대이다.

-“둘째 현대 사회에서 하나됨의 신학은 기독교 공동체 내부를 넘어 세상과의 소통과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

세상과의 ‘소통’은 복음을 전하는 통로이기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또 미디어 매체를 통해 신자의 몫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과의 ‘통합’은 부적절한 표현이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6:14-16)

-“요한복음의 통합이 공동체 내부의 일체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특징으로 했다면 현대 기독교는 세상과의 갈등을 넘어서서 세상과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통합까지 지향하는 하나됨의 신학을 탐구해야 한다”

세상과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통합을 지향하는 하나됨의 신학은 적그리스도 정부를 위한 신학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학인가? 신학은 마땅히 신앙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

-“셋째, 종국적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 공동체 내부의 사랑의 언어를 넘어서서 때로는 적대적일 수도 우호적일 수도 타협적일 수도 있는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위한 창조적으로 변형된 언어와 신학이 필요하다”

교회는 창조적으로 변형된 세상의 언어가 아니라 “천지가 다하기까지 결코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해야 한다(마5:18, 계22:18-19).

-“고별기독 속 하나됨의 신학은 천상적 세계와 지상적 세계를 넘나든 예수의 실존처럼 세속화된 세계와 소통하는 종교의 새로운 존재론적 변화를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이 규정 되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가는 ‘실존’적 존재가 아니라, “상고에, 영원에 근본”을 두신(미5:2)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빌2:6).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과 지상을 넘나든다는 보살이나 헤라클레스같은 존재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요1:18). 지상에서 주님은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셨고(마4:11) 천사를 명하시고(마26:53) 말씀의 권세로 마귀와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셨다(마26:53, 막9:25).

예수님은 부활승천 후 약속대로 성령님을 모든 신자에게 보내주셨고, 고별기도의 말씀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끝날까지 성령 안에서 일치와 연합(unity in diversity)을 이루어 가며 주님의 지상명령을 지켜갈 것이다.

요컨대 종교의 새로운 존재론적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고후5:17) – 즉 예수님과의 영적 연합에 의해 ‘말씀’에 따른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의 변화’가 오고 오는 세대에 계속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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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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