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근실하게 주의하여 지키라고(신28:1) 명하셨는데, 그중 우리가 가장 조심스럽게 지켜야하는 것이 요즘들어 부쩍 바로 우리의 ‘말’이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 생활 후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요단강을 건널때 ‘말씀’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맨 레위 제사장을 뒤따르게 하셨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을 명령하셨다. 그 작전은 오늘날 영적 전투태세에 임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말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 앞에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을 세워 백성과 함께 6일 동안 성을 하루에 한번씩 돌도록 명하신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디 데이인 7일째 날이 되기 전, 성을 도는 6일 동안 하나님께선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어떤 말도 일체 발설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입을 단속하셨다(수6:10). 왜 그러셨을까?
생각컨대, 백성들이 나팔소리를 듣는가운데 오로지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기도’에만 집중하도록 하신 것 같다. 그럼으로써 불신의 말은 물론, 기도의 영감에서 비롯된 승리의 확신에 찬 불같은 열정일지라도, 혹여 인간적인 생각들이 여과없이 부정한 입술로 발설되거나 하여, 하나님 보다 앞서가는 성급한 오만을 범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과 동시에, 긴박하고 예민한 결정적 시간에 이 편의 헛점을 노리는 적에게 ‘말’의 실수로 인한 빌미를 제공할 틈을 주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리라.
오늘 날 우리나라의 교회사회 내 정치적 관심은,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크리스찬 리더들이 구국일념으로 은사에 따라 애국집회를 개최하거나 기도와 예언의 은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고무하고 영적인 구심점을 구축하는 헌신적인 수고들을 여기저기서 감당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러한 엄청난 수고에 비해 한가지 너무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선하고 충성된 마음의 동기와는 별개로, 크리스찬 리더들의 감정과 언어의 절제가 일부분적이라도, 너무도 허술한 나머지 오히려 세속보다 더 조야한 인상을 끼치므로, 영적 전쟁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고도의 문화적 세련미로 대중들에게 어필하려는 대적자들에게 너무도 많은 공략의 기회와 빌미를 쉽사리 제공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영적 지도자가 공개적으로 영적 대적관계에 있는 상대방의 실명을 거론하며 기도의 형식이라도 저주와 비방의 언어를 거침없이 쏟아낸다면, 아무리 기도와 예언의 은사가 출중나다고 하더라도, 이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성품에 정면 반(反)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들거나 실족케 하는 큰 우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공적인 대중 집회에서의 선포는 개인적으로 골방에서의 기도중 선포와는 다르게 막중한 영적인 책임감이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싸움은 ‘육체’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에 대한 싸움이지 않는가(엡6:12)?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는 성경 말씀이 새삼 강하게 가슴에 부딪힌다(약3:11).
일례로, 유다를 공격하러 온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 앞에서 일부러 유다 방언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히스기야 왕을 비방하며 왕과 백성들의 사이를 이간하여 유다의 저항의지를 무력화 시키고자 수단방법을 안가리는 심리전을 폈다. 그러나 그때 히스기야 왕의 명령에 따라 유다 백성들은 전혀 대꾸하지 않고 모두 잠잠히(사36) 입술의 문을 굳건히 지켰다.
실로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말’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익히 알았던 지혜로운 영적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산헤립 왕이 시킨대로 거들먹거리며 하나님과 유다 왕국을 능멸하는 언어폭력을 마구 행사한 랍사게와 산헤립 왕이 그 자신들의 한 ‘말’로 인해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견책을 받을 걸 미리 알고 있었다.
과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히스기야 왕의 예측대로 하나님은 랍사게와 산헤립의 그 모든 ‘말’을 들으셨음이 증명되었고, 하나님께선 ‘입술의 문’을 신실히 지키며 경건히 기도에만 전념했던 히스기야 왕으로 인해 일을 행하실 수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랍사게와 산헤립은 패망을 당하였다(사37).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능욕과 훼방과 더불어 인간의 분노와 오만의 말 또한 미워하시고, 히스기야처럼 입술의 문을 굳게 지키고 경건히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신다는 중요한 교훈을 우리는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비록 이념이 다르더라도 특정 정당의 구체적 개인에 대해 신앙리더가 악마의 프레임을 씌우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에 대해서 혹은 북쪽의 지도자에 대해 공공연한(?) 테러리스트를 자인하는 발설에 대해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보실까?
또 특정인이어야만 한국이 산다거나 특정인이라면 한국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극단적 자기암시가 정치인들뿐 아니라 소위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너무도 팽만해 있는 이런 현상은 오히려 ‘하나님의 부재’를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크리스찬의 신앙은 이데올로기적 대결이나 체제전쟁과도 다르고 교회적 유익을 위한 투쟁과도 본질과 결이 다른 차원의 ‘영적 전쟁’인 것이다. 열심당원인 바라바를 대신해 오히려 에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몰인격적인 언어를 남발하는 품위없는 크리스찬 보단, 설령 가식적이라 할지라도 인격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품위를 지키는 비크리스찬에게 사람들은 거부감이 훨씬 덜하거나 호감이 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 연약한 신자나 비신자라면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혹자가 언어를 개인의 존재의 근거라고 하는 이유는, 언어에는 개인의 전인격을 형성하는 사고와 가치관과 정서와 도덕과 세계관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성과 언어는 별개의 것이라는 안이한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 언어를 통해 우리 모두 자신의 신앙의 질(質)을 점검하고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일 것이다.
기성 교회리더의 비순화적인 언어는 다음 세대에게 대를 물리고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경제적으로 현격히 발전한 국가의 위상과는 너무도 괴리가 크고 낙후된 듯한 대한민국의 교회의 수준인 것으로 자칫 인상지우는 불행을 자초하게 될까 심히 염려스럽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