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채 총장
서병채 총장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로 널리 알려진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은 미국의 동부 맨하탄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함께, 그 반대 편 서해안에는 ‘책임의 여신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하나는 ‘자유’의 여신상, 다른 하나는 ‘책임’의 여신상. 물론 이것은 은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유를 가질 때, 그것과 함께 책임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겠다. 어쩌면 자유를 추구하고 시작된 미국이 이제는 책임을 지는 미국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100/0의 원칙’이라는 기사를 한 번 읽은 적이 있는데, 내용의 요점은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자신이 100%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을 탓한다. 돈을 못 버는 남편에 대해서는 무능하다고 한다. 교회가 부흥이 잘 안 되면 교회는 담임목사 탓으로, 반면 목사님들은 교인들의 탓으로, 자녀는 부모 탓 부모는 자녀 탓 등등.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에 소중한 에너지와 정신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에너지가 그런 것에 소모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이란 참 어리석고 무지하지 않은가! 쓸데없는 판단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닌가! 현재 내가 처한 상황, 나의 위치-잘 났든 못났든-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전적으로 내가 아닌가?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가? 어찌해서 현재의 상황에 있다면 최종 결정은 우리 자신이 했음에 틀림없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로 나를 끌고 간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라는 것에만 너무 치중할 때가 있다. 좀 비약적인 예가 될런지 모르겠으나 술도 너무 많이 마시면서 “내 자유인데 왜 그래?” 그런데 그 결과 건강에 대한 책임은 어떡할 것인가? 운전을 너무 자유롭게 속도를 내면 그 결과는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너무 자유로이 많이 먹어서 비만이 된 경우 그렇게 된 상황이 있었을 테니 이해는 하지만 결과적인 책임은 본인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진다. 자유의 남용, 오용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내가 100%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 어쩌면 다른 사람은 제한적으로 자유를 갖게 될 것이다. 즉, 자유도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범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내가 우리 대학의 직원들을 비난한다고 해보자. 능력이 없다, 행정에서 부족하다고 비난해본들 달라지는 건 없다. 변화는 그들 자신의 몫이지 내가 밀어부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만 시간 손해, 에너지 손해, 나빠지는 성격 등등으로, 나의 어리석은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위의 ‘100/0의 원칙’에서처럼 모든 작금의 문제는 오히려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그런 나 자신의 현실을 내가 극복하면서 주어진 달란트, 특기를 살리고 갈고 닦아서 오히려 자신에게 만족하여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더 지혜롭다고 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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