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4. 우남과 배재학당(培材學堂)

배재는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그 명맥은 오늘날 배재중·고등학교 및 배재대학으로 이어졌다. 고종 22년(1885) 7월 아펜젤러 목사가 서울에 들어와 1개월 먼저 와 있던 스크랜턴 의사의 집 한 채를 빌려 두 칸짜리 방의 벽을 헐고 조그마한 교실을 만들었다. 같은 해, 8월 3일 이겸라(李謙羅)· 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근대학교의 시초기 되었다. 고종은 1886년 6월 8일 고종은『배재학당』이란 교명과 액(額)을 내리었다. 『배재』란 배양영재(培養英材)란 말의 준말로 이는 유용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인데 아펜젤러는 그의 선교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교육철학을 보고하고 있다.

"유용한 인재는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주의 피로써 구원받지 않고는 양육 될 수 없다. 학생들은 길을 묻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기도와 심령의 소원은 이 학교를 특별한 영적인 힘이 넘치는 기관으로 만드는데 있다."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 버리고, 또 한 명은 6월이 외국어 배우기에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 버리고, 또 다른 가족의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10월 6일인 지금 재학생 20명이요, 실제 출석하고 있는 학생 수는 18명이다." 학당의 설립목적으로 아펜젤러는 ‘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학교의 일군을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요,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배재학당의 학당 훈은 '큰 인물이 되려는 사람은 남을 섬길 줄 알아야 된다(欲爲大者當爲人役)'고 해서 기독교적 교훈으로 봉사적 인물을 양성하려 하였다. 교과목으로는 한문·영어·천문·지리·생리·수학·수공·성경 등이 있었고, 그 외의 과외활동으로 연설회· 토론회와 같은 것을 열어 의견 발표 훈련을 시켰고, 정구·야구·축구 등 운동을 과하였다. 학교 운영 방침에 학년을 두 학기로 나누었으며, 수업료는 종전의 물품대신 돈으로 받았고, 입학과 퇴학의 절차를 엄격히 규정하였고 근로를 장려하였다.

배재학당은 청년 우남에게는 서양문명에 눈을 뜨게 한 별천지와 같은 곳이었다. 우남이 다니던 당시에 배재학당은 한국인, 서양인, 일본인, 청국인이 두루 섞여 배우고 가르치는 국제적인 분위기의 학교였다. 1894년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 조선의 종주국 청국이 패배하자 세상이 크게 바뀐 것을 깨닫고 우남은 나이 20세가 되던 1895년 4월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그 곳에서 1897년 2월까지 영어와 신학문을 연마하였다.

배재학당 영어과에 들어간 우남은 영어공부에 치중하면서 역사, 지리, 산수, 성경 등 교양과목을 이수 하였고 또 학당에서 의무화한 아침 예배에도 참석하여 설교를 들었다. 배재학당에서의 교육을 통하여 우남은 서양의 정치적 관념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자신의 모교인 필라델피아 주 랜캐스타 소재 프랭클린 앤 먀살대학을 본 딴 교양 중심의 대학으로 육성시킬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1891년부터 1902년까지 본국 선교부에 제출한 연회 보고서에서 배재 학당을 Paichai College 라고 칭하였다. 배재학당의 이름은 1902년 이후에 배재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배재 100년사』편찬 위원회 편. (재단법인 배재학당, 1989) p. 63-64. 유방란, 『개화기 배재학당의 교육과정 운영 교육사 연구』, 8, (1998) p. 175-176, 182-183, 184. 참조)

청일전쟁(1894-1895)이 끝난 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었고,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외국어와 서양문화를 배울 것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조성 되었다. 그러나 우남은 서양의 문화와 종교를 배척하는 쇄국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우남의 모친은 어릴 적부터 그에게 불교를 가르쳐 왔던 터라 우남이 배재에서 사교(邪敎)를 믿는 외인들과 어울림으로 인해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는 이미 여러 해 동안 과거를 준비하며 이미 훌륭한 유학자가 되어 있었고 기독교와 유교가 양립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남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 서당을 떠난 사람들을 반역자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4년 7월에 갑오경장으로 인하여 과거제도가 폐지됨으로 우남에게는 등용의 길이 막혀버리게 되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서당시절부터 친구이며 이미 배재를 다니고 있었던 신긍유의 권유에 조심스럽게 배재에 발을 딛게 되었던 것이다. 우남은 “그들이 천상천하의 질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도 나는 내 모친의 종교를 절대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 당시 그의 생각이었다. 다음은 우남이 배재학당을 입학할 당시의 심경을 그린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을 하던 끝에 배재학당에 가서 영어를 배우기로 작정하였지만 며칠간 나의 작정한 바를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하에 몹쓸 교리를 가르치는 학당에 가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학교에 갔더니 노블(William Arthur Novel, 1866-1945)씨가 아침 예배에 참석하라고 했다. 그는 내가 난생 처음으로 말을 건넨 외국 사람이었다. 이익채에게 물어보니 학생들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하게 되어있어서 나도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우리들에게 무언가 먹고 마시게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박장대소하고 그럴 위험은 없다고 일러주었다. 예배 실에서 나는 뒷줄에 앉아 그 반에 있는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키가 큰 아펜젤러씨가 상단에 서서 청중에게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는데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이정식, 『이승만과 구한말 개혁운동』 ,「청년 이승만 자서전」, p. 307.)

우남이 영어를 배우려고 했던 것은 당시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우남과 가까웠던 에비슨 선교사는 우남에게 조선이 외국에 개방되면서 서양인들과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과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영어를 배우는 것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우남도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영어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는 아펜젤러의 연례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는 언제나 대단합니다. 이 새로운 언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왜 영어를 공부하려고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벼슬을 얻으려고’라고 대답합니다."(이만열, 『아펜젤러-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p. 290.)
입학 후 곧 발군의 총명을 드러낸 우남은 입학한지 불과 6개월 만에 배재학당 영어 조교사로 발탁되었고 동시에 제중원에 근무하는 미국 장로교 여성 의료선교사 파이팅(Georgiana E. Whiting)양과 재콥슨(Anna P. Jacobson)양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월봉 $20을 버는 행운을 얻었다. 배재학당에서 우남은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영어 이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우남을 자극한 것은 바로 영어가 아닌 서양 정치제도와 그 문명이었던 것이다. 특히 우남은 미국에서 온 고학력의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독립전쟁사 내지 건국사, 남북전쟁사, 노예해방 그리고 법치주의 원칙 하에서 누리는 미국 국민의 정치적 자유 등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한성감옥생활(1899-1904)과 옥중잡기 연구』 p. 169 에서 재인용).

이렇게 혁명적인 사상에 눈을 뜬 우남은 절대 군주제 하에서 신음하는 한국동포를 위해 이 나라는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일이 옳은 일이며 이 일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배재학당에 입학할 당시 나의 큰 욕심은 거기서 영어, 한 가지만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곳에서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의 개념이었다. 한국의 일반 백성이 무지하게 당하는 정치적 억압의 개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한 젊은이가 평생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법률에 의해 지배자의 횡포로부터 보호받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 어떠한 혁명이 일어났을 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우리가 그와 같은 정치적 원칙을 채택한다면 나라의 핍박받는 동포들에게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라고 다짐하였다."(유영익, 위의 책, p. 7. (올리버 수집, 이정식 소장 문서 ‘Autobio Rhee, 1912.' p. 5.))

이와 같은 우남의 생각은 갑신정변(1884)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1895년 말에 미국 시민권과 의사자격증을 취득하고 귀국한 서재필(Philip Jaisohn, 1863-1951) 박사가 1896년 5월부터 매주 목요일 학당에서 실시하는 세계지리, 역사 및 정치학 그리고 의사 진행법 등에 관한 특강을 들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처럼 배재 학당에서의 교육은 우남으로 하여금 조선이 당한 현실을 서양의 정치적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 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계속>

※일부 각주는 지면상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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