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문자적 의미’에만 갇히지 말고, 말씀으로 세상 읽는 눈 키워야
교회 리셋하려면 한국의 ‘역사적 뿌리와 정체성’ 이해부터
한국교회 ‘오늘’에 너무 집착, ‘미래’를 통찰하는 것에 약해
청소년 사역, 여러 가지 곁가지에 휘둘리면 지쳐, 핵심 때려야

탁주호 목사
탁주호 목사가 선교사 자녀 캠프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탁주호 목사 제공

지난 (上)편에 이어

Q, ‘해석’ 그리고 ‘오늘의 의미’를 강조하시는데 어떤 의미인가?

A.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좀 짧다 보니까, 성경에 대해 기능적 전달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신학적으로 성경의 ‘주해’라는 것은 ‘과거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해석’이라는 것은 ‘오늘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사실은 한국의 목회자들이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과거의 의미’를 찾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 가르치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말씀이 세상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살피는 것에는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세상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제 ‘과거의 의미’에서 ‘현재와 오늘의 의미’를 찾아서 실천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세밀하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오늘날 그렇게 하는 교회들이 있다.

또, 한편으로 일부 교회 중 소위 ‘좌파’적인 사람들 중 일부는 성경의 메시지를 아주 깊이 이해하기보다 곡해하고 문자적인 의미만 살펴서, 너무 현대적인 상황에 맞춰서 사람들의 행동과 삶을 바꾸려고 끼워 맞추며 성경을 너무 왜곡하게 되는 경향도 있다. 이 두 가치가 아주 치열하게 ‘양극화’되면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요새는 ‘융합의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너무 성경 쪽에만 치중하는 신앙인은 좀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또 너무 삶과 인간의 생각에만 머무는 사람들은 성경으로 좀 시선이 고쳐져야 한다. 그래서 보수적인 교회는 좀 삶의 문제를 다루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좀 깊이 살피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리셋’과 ‘재정비’가 필요하다.

Q. 목사님께 영향을 준 사람이나 책이 있는지?

A. 나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제사를 지내면 지방을 쓴다. 그때 직위나 벼슬이 없는 사람에게는 ‘학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내가 어릴 때나 믿지 않는 집안에 가서 그런 상황을 보게 될 때, 나는 그래서 ‘학생’이라는 쓰여진 사람들을 참 좋아했다. ‘이 사람은 평생 배우다 죽었다.’ 사실은 내게 영향을 준 사람을 한 사람을 뽑을 수 있고 책도 뽑을 수 있다. 그런데 보통 책을 쓰고 추천사를 받을 때 유명한 사람에게 그리고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에게 받는다. 그런데 내가 ‘큐티는 파티다’라는 책을 쓸 때, 누구에게 추천사를 받았냐면, 초등학생 1명, 중학생 1명, 고등학생 1명, 전도사님 1명, 교육자 1명, 이렇게 추천사를 받았다. 어떤 아이가 추천사에 “목사님이 가르치는 큐티 방식은 ‘연애하는 법’만큼 재밌었다”라고 썼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나에게 영향을 안 준 사람이 없다.

탁주호 목사
탁주호 목사가 추천한 현대 사회의 흐름 이해를 위해 추천한 책들 ©기독일보 디자인팀

코로나 정국에 영향을 받은 책들은 아까 말했듯이,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클라우스 슈밥, 최윤식 박사의 책 등등이 있다. 이 작가들이 현재 몇 년 간을 나를 데려 왔다. 내 삶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서울에 와서 직장 다니던 때, 그리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할 때, 그 시기마다 나를 끌고 온 책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사람 중 한 명을 소개한다면,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쓴 탁석산 씨의 책을 꼽고 싶다. 왜냐면 내 정체성을 굉장히 잘 설명해 준 책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재미있는 글 중에 하나가 이런 것이다. ‘기독교인은 죽으면 천국 간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이 천국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계에서 통상적인 이런 믿음이 있다. 그런데 탁석산 씨가 “기독교인들은 ‘죽으면 천국 간다’라고 말하면서 안 죽으려고 한다. 그 좋은 천국이 있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그런 기독교인들을 보니 나는 천국을 믿지 않는다”라고 했다. 거기에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허무주의’가 잘 나와있고, 아까 언급한 ‘시대구분’도 나와 있고, 한국인의 복잡한 종교, ‘성리학’적 영향 이런 것들이 잘 언급되어 있다.

거기에 역사를 되짚어서 잘 설명한다. 우리는 5000년간 ‘샤머니즘’의 시대와 살아왔다. 삼국시대 소수림왕이 불교를 들여왔다. 불교가 한 일은 샤머니즘을 타파하기 위해 500년을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샤머니즘과 ‘짬뽕’이 된다. 다음 600년 동안 유교가 들어온다. 내가 역사적 인물 중에 제일 좋아하는 인물인 ‘정도전’은 종교를 바꿔서 나라를 세웠다. 그는 불교를 타파하고 유교를 앞세워 나라를 세웠다. 세계 유일하게 종교를 바꿔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불교가 고려 시대 때 문제가 많았다. 유교가 600년간 한 일은 불교를 깨부시는 것이 목표였는데, 유교는 불교와 샤머니즘이 다 함께 섞였다. 우리 집에 재미있는 책이 한 권 있는데, 바로 ‘무당과 유생들의 대결’이라는 책이다. 얼마나 그 당시의 유생들이 우상숭배를 격파하는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인들을 보는 것만큼이나 엄청나다. 그런데 짬뽕이 됐다. 신라시대 ‘경교’를 얘기하지만, 기독교는 이제 한국에 들어온 지 200년이 됐다. 기독교는 뭔가 샤머니즘 더하기, 불교 더하기, 유교 더하기, 그렇게 ‘짬뽕 곱배기’같다. 

또 하나는, 그 책에서 가르치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내세적 허무주의’, ‘현실주의’가 있다. 사람들이 현실에서 극단적인 어려움에 처하면 비기독교인들은 자살로 끝난다. 내세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에도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현실주의’ 혹은, ‘현실주의적 성공’을 성령의 은혜로 가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면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면서 ‘성령의 은혜’를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물론 나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것에 분명하게 역사하시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정서에는 죽어서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현실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한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죽어서의 사후 세계’ 즉 ‘미래’가 없는 한국 사람들은 안 죽으려고 하고 현실에서 죽기 살기로 일하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의 ‘죽으면 끝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나의 해석으로는 한국교회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에 너무 집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세대에 모든 것을 다 이뤄놓으려고 한다. 이런 것이 기도에 접목되면 ‘샤머니즘’적인 측면이 생긴다. 사실 ‘기도’라는 것이 ‘사복음서’에서는 ‘pray’가 아니라 ‘ask’로 나온다. ‘묻다’, ‘질문하다’이다. ‘구약 성경’은 항상 ‘사복음서’를 향해 있다. 성경의 구약의 얘기를 문자적으로 사복음서에 적용하면 안된다. ‘사복음서’는 구약 성경을 ‘재해석’한 책이다. 그리고 로마서부터 ‘서신서’는 ‘재해석’을 실천하는 ‘적용의 책’이다. 그 핵심은 ‘사복음서’이다. 사복음서를 잘 살펴보면 ‘기도’에 대한 표현이 전부다 ‘ask’ 즉, 하나님 말씀에 대해 ‘묻고,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환되는 것을 ‘교제’, ‘사귐’, ‘대화’라고 얘기한다. 이것이 기도이다. 기도라는 것은 기도하기 전에는 ‘문제가 크게 보이고 하나님이 작게 보이는 것’인데, 기도 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엄청 크게 보이고, 문제는 작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이 문제를 치워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절대 안 치워 주신다. ‘초신자’들 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치워 주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크게 보이고 더 이상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응답이다. 우리 어머니는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내가 어머니를 전도해서 교회를 가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예배를 드리면서 대표기도를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 “저 양반보다 내가 더 기도 잘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우리교회 부흥되게 해 주시고, 여기 나오는 사람 잘 되게 해 주시고, 복 주시고…’ 이런 것. 여기에 질문이 있는가?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기도가 있는가? 없다. 그러니까 정체성의 문제, 사상과 체제, 가치에 대한 ‘위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탁주호 목사
탁주호 목사는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창비

Q. 청소년 사역, 어떻게 진단하시고 어떤 조언을 주시겠는가?

A. 최윤식 박사의 책을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하면 2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사람은 ‘두더지 게임’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욕심이 올라오면 치고, 치고 나면 또 옆에 있는 것이 올라오고, 또 치고 나면 아까 올라왔던 것이 또 올라와 있다. 이렇게 ‘두더지 게임’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도미노 게임’은 수 천개의 도미노가 있더라도, 첫 번째의 도미노를 딱 치면 모든 도미노가 해결이 된다. 우리가 아까 언급한 ‘위대한 리셋’을 시작할 때, 이것 저것 ‘두더지 게임’을 하면 안된다. 찬양이 안되니까 찬양에 신경 쓰다가, 말씀이 안되니까 말씀에 치이고 이렇게 ‘두더지 게임’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리셋’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단 한 개의 ‘첫 번째 도미노’를 찾는 것에 집중하면 이어지는 스무개의 다른 문제들이 해결된다. 나는 이것을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한국인의 정체성과 한국 사회를 보는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현대 사회와 교회의 흐름과 문제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시각과 관점이 있어야 한다.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십일조하는 방법을 또 가르치고, 기타치는 법을 또 가르치고 이렇게 그때 그때 여러 가지를 힘 빠지게 가르칠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아이들이 지금 여기, 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지점 하나’를 명확히 가르쳐 주면 다른 일은 아이들 스스로 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그 책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십대들의 머릿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더라.

그 책에서 ‘청소년들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심리학자가 조사했다. 그런데 비슷한 사람을 하나 찾았다. 누구냐면 ‘미친놈’이랑 똑같더라고 하더라. 그래서 ‘십대들은 전부 미친 놈들이다’라고 하더라. 내가 중고등부 사역할 때 교회에서 보면, 얘들은 전부 미친놈들이다. 그런데 중고등부 교사들은 교회에서 ‘엘리트’인 사람들이 하고 있더라. 정말 교회에서 ‘멀쩡한 사람들’이 다 교사를 하고 있다. 멀쩡하고 엘리트인 사람들이 그들의 입장, 그 눈으로 얘들을 보면, 얘들은 ‘문제아’ 투성이다. 그런데 만약에 미친 교사가 미친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정말 정상적인 사역이 된다. 그래서 내가 항상 교회에서 교사 세미나 할 때, 사역자들에게 “중고등부 교사부터 바꿔라, 그들을 ‘미친놈’으로 바꿔라”라고 주문한다. ‘미쳤다’라는 단어가 ‘또라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Passion’ 즉 ‘열정’이다. 그래서 청소년 사역의 ‘도미노 게임’에서는 아이들에게 열정을 건드려라. ‘열정’을 터치해야 한다. 그러면 ‘수천 개’의 도미노가 다 무너진다.

내가 아이들에게 ‘열정’을 터치하면, 얘들이 공부하는데 미쳐버리고, 성경 읽는데 미쳐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돌팔이’ 같은 짓을 하기도 한다. 찔러놓고 “아! 여기가 아닌가벼” 계속 이런다. 싸움의 ‘고수’들은 ‘한 놈’만 팬다. 그리고 ‘명의’들은 찔러야 할 곳을 정확히 찌른다. 이것이 ‘도미노 게임’이다. 그 한방을 터뜨리기 위해, 설교도 하고 찬양도 하고 수련회도 하는 것이다. 한의원 다녀보면 명의들은 힘을 한 곳에 집중한다. 그런데 ‘돌팔이’들은 중고등부 학생들 여기 저기 찌른다.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엄마들이 “공부해라!”라고 했다가 “교회 안가냐!”고 소치친다. 여기 저기 찌른다. 그러면 아이들이 헷갈린다. 지친다. 이러면 안 된다.

아이들과 싸움할 때도 기술이 필요하다. 잘 때려야 한다. 코피를 탁 터트려야 한다. 그런데 때리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다. 아이들 중에 이런 친구들이 있다. 때리면 참고 꿈적도 하지 않는다. 이런 친구들인 마음을 비운 친구들이다. 나는 교육할 때 이렇게 목 내놓고 “때릴테면 때려 봐라”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을 때릴 때, 한 방에 코피를 잘 터뜨려야 하지만, 또 안 때려야 할 애들은 안 때려야 한다. 이것이 이기는 방법이다. 우리는 아이들과 싸움을 하기 위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이 ‘도미노 게임’을 하기 위해서 ‘원 카드’가 필요하다. 바로 세상의 사람들은 ‘정체성’,‘세계관’이라는 말을 쓰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가치관’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성경적 가치관’이다. 이 ‘원 카드’를 갖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수년에서 수 십년도 걸린다. 아이들이 ‘술 먹는 것’, ‘담배 피는 것’이 진짜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가? 우리가 담배 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한 개비가 아니라 스무 개비도 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을 잘 다루지 않고 아이들을 다그치면, 아이들이 혼자 몰래 피기도 하고, 다른 애들에게도 몰래 피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술, 담배’를 멀리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국채보상운동’과 관련이 있다. 그 시절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하기 위해 막대한 차관을 강요했다. 한국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이 “우리나라가 이렇게 빚 때문에 외세의 압력을 받아 살아가는데, 믿는 자로 우리 것을 희생하고, (술 담배를) 줄여서라도 빚을 청산해서 떳떳하게 살자”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이런 국가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이 세상에 덕이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이 이를 위해 담배와 술을 줄이기 시작했고, 이것이 너무 좋아서 점점 한국교회의 문화로 굳어진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 ‘국가관’ 때문이었다. 이것이 현대까지 이르러 한국교회의 기준이 됐다.

우리가 담배피는 아이들에게 ‘담배 피우는 것이 죄’라고 말하기 전에 이런 상황들을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아이들에게 ‘이것 하지마! 저것 하지마!’라고 하면, ‘두더지 게임’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로, 교회에서 ‘맥추감사절’에 헌금을 하면 그 다음 달에 십일조와 감사헌금이 많이 준다더라. 감사헌금을 낼 돈으로 맥추감사헌금의 봉투만 바꿔 헌금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일들이 참 많다. 꼼작 달싹 못하는 폐쇄적 사역들이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다. 이런 문제들을 교회에 제기하면, 교회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냥 교회에 ‘원 카드’를 심는 일에 집중한다. 그래서 ‘핵심’을 바로 세워놓으면, 아이들이 이제는 여러 문제를 크게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크게 보인다.

술 먹고, 담배 피는 것같이 비본질적인 것에 함몰되어 아이들과 싸우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면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이것에 대해 아이들이 그 의미와 본질을 자신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교사와 부모들이 도와줘야 할 일이다. 그런데 ‘도미노 게임’을 시작하면 다른 문제는 쉽게 간다. 나는 “너가 범사에 나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의 길을 지도할 것이다”라는 잠언 3장 6절의 말씀을 좋아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 교역자들과 부모들이 지금까지 해 왔던 과거로부터 해 왔던 잘못된 접근과 방식 말고, 다시 말씀에 근거해서 ‘위대한 도전’을 한다면, 문제들은 줄줄이 해결 될 것이다. 제발 기술적인 것과 프로그램에 집중하지 말고,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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