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성길 교수
민성길 명예교수

1940년대만 해도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성 억압적 상태에 있었다. 1939-1940년의 한 설문조사는 청소년들 20명 중 1명만 자위가 무언지 알고 있었고, 4명중 3명은 여자가 월경하는 줄 몰랐다 한다. 그러다가 이차 세계대전(1939-1945)이 일어났다. 전쟁은 성문화를 크게 변화시킨다. 이차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전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다.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 하에서 섹스에 강박적이 되었다. 전쟁의 성문화가 전방이면 전방, 후방이면 후방을 휩쓸었다. 이차대전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대한 성적 탐닉의 장관을 보여주었다.

D-데이에서 베를린까지 가는 동안 미군병사는 평균 25명의 여자와 잤다고 한다. 독일 역사가들은 독일을 점령한 러시아, 미국 등 4개국 병사들이 강간이나 기타 “정사”로 최소 40만명의 아이들(“occupation babies”)을 낳게 하고 떠났다고 하였다. 독일군은 더 심했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지역에서 강간이나 “정사”로 일백만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태어났다. (프랑스에서만 20만명이었다) 그러나 전후 전범재판에서 1700만 독일 군인들 중 5,349명만 “도덕적 범죄“로 처벌받았다.

다시 매독이 창궐하였다. 당시 매독은 치료방법이 없어, 전투에서의 부상보다 더 무서웠다. 미군의 경우 성병으로 하루 18,000명의 병력손실이 있었다. 미군 당국은 군인들에게 “손쉬운 여자친구(‘easy’ girl-friend)는 매독과 임질을 퍼뜨린다.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눈이 멀고, 정신병이 들고, 마비가 오고, 일찍 죽는다”고 경고하여야 했다. 군 당국은 병사들에게 콘돔을 배급하고, 위생병이 뇨도에 소독제 주입하는 방법으로 방광과 뇨도를 소독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경에는 성병 발생이 30분의 1로 줄었다.

순진한 젊은 군인들은 도시로 휴가 나오면 적극적인 젊은 현지 여성들과 어울리거나 매음굴을 찾았다. 미군은 휴가 나온 장병들의 매춘을 모른 채했다. 예를 들면 하와이 거리의 매음굴에는 250명의 등록된 창녀들이 있어 3분 서비스에 3달라를 받았다. 해외 주둔지마다 매음굴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팔레르모에서만 6곳이 있었다.

독일군은 더 용의주도하여 군 매춘업소를 직접 운영하였다. 그 이유는 성병 예방, 여자 스파이 방지, 동성애 혐오(여자접촉을 금하면 동성애 할가봐) 등이었다. 독일군은 1940년까지 점령지에 군 매춘업소의 방대한 네트워크를 설립하였는데, 1942년에는 유럽에 500여개의 매춘업소가 있었다.(파리 시내에만 19개소) 장군들은 병사들이 주1회 정기적으로 매춘업소를 찾도록 권장하였다.

독일군 매춘업소에는 공식적으로 34,140명(추산 약 5만명)의 젊은 여성들이 강제로 매춘하였다. 그 여성들 중에는 (수용소와 죽음을 피해) 자원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강제로 온 여성들이었다.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술집 같은 곳에서 젊고 예쁜 여자들 납치하기도 하였고, 강제 수용소에서 여성들을 차출하기도 하였다. 나치는 국가적으로는 아리안을 우대했으나, 매춘업소의 창녀는 유대인, 집시, 흑인, 슬라브인 상관하지 않고, 예쁘기만 하면 일하게 했다. 이런 하급 인종과 성교하는 것은 “내적 결합”이 아니기 때문에 독일인에게 해롭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SS 장교들은 우선적으로 예쁜 여자들을 차지하였다.

독일군은 매춘업소를 일일 스케쥴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등, 섬세하게 운영하였다. 여자들은 주중 1-3회 성병을 체크 받게 하였다. 화대로 병사 1인당 15분에 3마르크(현재 가치 약 20달라)를 받았다. 병사는 성행위 전과 후에 성기와 뇨도를 소독하여야 했다. (장교는 콘돔을 안쓰는 대신 더 돈을 주어야 했다)

여자들은 창녀표식으로 “Feldhure” (戰場의 매춘부라는 의미)라는 글자와 일련번호를 문신 받았다. 병사는 손님이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여성을 성폭력(강간)하는 것이었다. 병사가 서비스질이 나쁘다고 불평하면 여자는 처형될 수 있었다. 여자들은 하루 24-40명의 병사를 손님으로 받았는데, 몸이 견디지 못해, 대개 6개월 이내 질병, 자살, 살해, 임신 등으로 죽었다고 한다. 임신을 피하기 위해 불임수술을 받았는데, 마취 없이 수술받기도 했다. 성병 또는 병에 걸리면 병원으로 보냈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임신 3개월 되면 어디론가 살아졌다.

이들 모두는 성노예였다. 그들은 결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운좋게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와도 가혹한 스티그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귀환한 창녀를 처형하기도 했다. 전후에도 그들은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후방은 후방대로 문제가 많았다. 병사들은 고향의 부인이나 여자 친구가 진실하기를 기대했지만, 일차대전 때처럼 여성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행동을 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청소년들은 학교보다 공장에서 일하고 보수를 받아 노는데 썼다. 런던의 경우 소년, 소녀들은 야간 공습 중에도 어두운 뒷골목에서 성행위를 하였다. 여자아이들은 전쟁 영웅에 심취하여 군복 입은 군인들에 매혹되었다. 모든 것이 1차대전 때와 유사하였다.

전후 평화가 찾아오자, 군인들은 집으로 돌아오고, 여성들은 부엌으로 돌아가고, 청소년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모두들 아무 일 없었다는 식으로 가장했으나, 그들은 그 이전시대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들은 결혼하여 1960년대 장차 이차 성혁명을 일으킬 베이비부머가 될 자식들을 낳기 시작하였다.

지난 39회차 칼럼 ‘일차세계대전과 성문화’에서 썼던 바와 같이, 우리 크리스천은 전쟁 자체의 살육행위를 반대하여야 하지만, 그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인간성의 파괴와 부수적인 성도덕의 붕괴도 경계하여야 한다.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민성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