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교수
이정훈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제공

2022년 대선이 끝났다. 필자가 대선 후보 간 경쟁이 뜨거웠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떤 후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후보인가?”라는 것이었다. 많은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때 대표기도를 했던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선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 시대에 적합한(필요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필자는 이러한 기도를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거를 포함한 크리스천의 정치 활동의 전제가 되는 올바른 성경적 정치의식이다. 기도로 드러나는 정치의식은 크리스천의 정치 참여와 활동의 전제가 된다. 전제가 잘못되면 정치 활동에도 문제들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현대정치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과 같은 인물이 당선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일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나라’를 ‘기독교 신정국가’로 오해함으로써 이러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필자는 진단한다. ‘다윗’은 정치적 비유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라고 항변해도 구약시대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통치자를 2022년 한국 대선에서 이상적 정치인의 모델로 비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현대정치의 올바른 정치의식과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통전적 정치의식에도 부합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은 특정 후보가 무속-신천지와 관계가 깊은 인물이라는 상대편의 네거티브 프레임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교회에 확산시키기도 했다. 성도들이 다른 후보를 선택하게 하려는 일종의 종교선동이었다. 제법 권위 있는 신학자로 알려진 한 원로인사는 특정 후보를 ‘히틀러’에 비유하는 막말과 함께 특정 후보를 찍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혀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부끄러운 추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무속에 온정적인 정도를 넘어서 ‘종교혼합주의’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목회자들과 더불어 ‘무속’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특정 후보를 비판했던 현상은 정치 이데올로기가 신학과 신앙을 지배하는 교회의 타락과 이에 따른 선동의 방증일 뿐이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직통 계시를 받는다는 선지자를 따르는 일부 크리스천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채 그들만의 정치 활동을 벌였다.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누가 당선된다’ 또는 ‘어느 당이 이긴다’는 하나님을 망령되게 불러대는 예언이 판을 쳤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당선인을 점치는 무속인들을 비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기독교 신앙이 도덕적으로 독립과 건국의 바탕이 되었던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신앙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의견대립이 팽팽하다. 피터 릴벡(Peter A. Lillback)은 조지 워싱턴을 이신론자나 세속주의자로 묘사한 기존의 역사가들을 비판하면서 조지 워싱턴이 ‘헌신적인 성도’(committed churchman)였다고 강조했다(Peter A. Lillback, 2008). 우리가 현대정치에서 주목해야 하는 역사적 사실은 조지 워싱턴 개인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가 여부보다는 그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를 지지했다는 측면이다. 그는 당시 박해를 받을 수 있었던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법률가로서 미국 헌법의 기초를 고안했던 제임스 메디슨(제4대 대통령)과, 일부 음모론자들이 프리메이슨으로 지목해서 자주 거론되는 토마스 제퍼슨은 ‘종교의 자유’와 ‘국교부인(정교분리)’의 헌법적 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위대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는 정치인 개인의 신앙보다 그(또는 그가 속한 정당)의 정치적 사상과 정책이 교회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을 정치사에서 최초로 실현하는 국가를 세웠다. 이에 따라, 역사 속에서 자주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유대인들도 자유를 누렸으며 장로교,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가 국교설립에 따른 차별 없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자유대학교를 설립하여 국가의 간섭 없이 교회의 리더들을 양성하기 위해 분투했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의 헌신과 고통을 숙고해보면 교회가 누리는 자유와 미국 헌법의 의의를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국가가 기독교 국가임을 선포하고 교회와 교단을 통제할 수 있으면 무엇이 좋을까? 예를 들어, 교회와 교단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권력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독점하게 되면, 개혁주의 신학자가 대학 강단에 설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필자가 미국의 헌법과 그 자유의 기초 위에 세워진 기독교적 정치문화를 지지하는 이유이다. 미국의 역사에서 교회와 크리스천은 지역마다 지방자치와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세우는데 활약했다.

특정 종교나 교파를 국교로 정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국가가 교회에 간섭하지 않고, 교회도 국교설립을 요구하거나 신정국가를 추구하지 않는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 속에서 모든 교파가 시민사회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교리와 교의에 따라 최대한의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 현대 자유민주주의와 정교분리를 명시한 헌법이 주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섭리와 절대주권의 권위로 우리에게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물로 주셨다.

2022년 한국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의 전통을 수호하고 더욱 계승 발전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21세기에 우리는 이러한 헌법을 수호하는 정치적 선택을 선거를 통해 실천해야 한다. 악법으로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헌정을 문란하게 만드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을 정치적 의무가 크리스천에게 있다.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국교회의 부적절한 정치의식에 대해 좌와 우를 막론하고 깊이 반성하고 우리는 이를 갱신-개혁해야만 한다. 어두웠던 식민지 시기에 선구적인 정치의식으로 독립과 건국의 초석이 되었던 신앙의 선배님들과 교회사를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크리스천들의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올바른 정치의식의 탑재는 부끄럽게도 교회가 세상과 정치의 부담이 되는 현재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한 개혁의 의무로써 받아들여져야 하겠다.

이정훈(울산대 교수, 성경적 세계관 교육 PLI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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