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인도 콜카타 빈민가에서 신앙과 봉사활동을 펼쳤던 ‘빈자(貧者)의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를 모르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87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녀의 일기가 교황청에 의해 발견돼서 로마로 옮겨졌다. 그런데 그녀의 일기를 본 사람들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수녀로서 또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항상 확신에 차 있을 것 같았던 그녀의 삶에 극도의 내적 불안을 겪은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2] 예를 들어, 1958년 그녀의 일기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 미소는 무수한 고통을 숨기고 있는 위대한 광대와도 같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믿음과 소망이 넘치고 사랑이 샘솟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그분의 뜻과 잘 소통하고 있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나의 진실을 알았으면 좋으련만.”

또 다른 일기에서는 이런 고백을 적어놓기도 했다.

[3]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믿었기 때문에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나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원하시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신지 의심이 가고, 하나님이 실존하시는 분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러한 고백에 대하여 로마의 유력 일간지 <일 메사게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3] “테레사 수녀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면 1년은 비전을 갖고 살았지만 나머지 50년 동안은 의심 가운데 살고 있었다.”

1979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 평화상 시상식장에서 테레사 수녀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빈자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

[4] 그러나 불과 3개월 전인 같은 해 9월 테레사 수녀가 자신의 정신적 동지인 마이클 반 데어 피트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 연설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내용이 적혀 있다.

“예수는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입을 움직여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5] 타임지는 테레사 수녀가 폐기되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존된 40여 점의 서한들은 그가 죽기 전까지 50년 가까운 세월 내내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그녀에게 신의 부재는 빈민을 돌보는 삶을 시작한 1948년부터 죽을 때까지 거의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것에 대하여 가톨릭의 한 성직자는 테레사 수녀의 의심을 ‘정화의 과정’이라 묘사했다.

[6] 기독교의 오랜 전통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이 믿음을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성숙한 신앙으로 이끄는 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잠시 잠깐이 아니라 50년 가까이 긴 세월 내내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사람에게 이 말이 어울리기나 한 것일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가 아내를 잃고 쓴 회고록에 보면 그가 하나님을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시지 않는 분”으로 묘사한 내용이 나온다.

[7]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본다.

지금은 다 자란 네 명의 아이들에게 주사 맞게 하느라 그간 치른 홍역들이 적지 않다. 흰 옷을 입고 청진기를 갖고 주사 바늘로 찌르는 의사를 겁내지 않는 아이는 없다. 뾰족한 주사바늘을 갖고 있는 의사를 막아줄 유일한 사람은 아빠다.

[8] 하지만 의사가 날카로운 주사 바늘로 부드러운 아들의 팔을 사정없이 찔러대는데도 아빠는 말려주지 않는다. 아프게 하는 의사보다 아프게 하지 않도록 막아주지 않는 아빠가 더 밉다. 사랑하는 아이를 아프게 하는 의사를 어째서 그냥 내버려두는지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 아빠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는 거의 유일한 때가 바로 그때다. 주사 바늘이 아파서도 울지만 무심한 아빠의 침묵에 서러워서 아이는 더 울먹인다.

[9] 침묵 속에 아빠는 속삭인다. ‘괜찮아 아들아! 지금은 설명해도 네가 이해할 수 없어. 다 네게 유익하라고 하는 거야!’

C. S. 루이스가 하나님을 어려울 때 도움을 주지 않는 분이라고 불평했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회고록 후반에 가면 그가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하나님 앞에 이런 질문들을 내려놓았으나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무응답’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잠긴 문이 아니었다.

[10] 그것은 침묵과 좀 더 유사했지만 그렇다고 동정심 없이 바라보는 기계적인 시선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고개를 내저으셨지만 그것은 거절의 의미가 아니라 질문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마치 ‘평안하라, 아들아! 지금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듯 말이다.”

이처럼 살다 보면 귀머거리 같고 벙어리 같이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이 이해가지 않을 때가 참 많다.

[11] 그렇다고 테레사 수녀처럼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부재의 감정 속에 살아왔다면 분명 문제 있는 신앙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고난의 터널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실존을 잘 파악하고 체험한 C. S. 루이스는 참 천국 백성답다 생각된다.

하나님의 침묵이 길다고 불평이 터져 나오는 이가 있는가?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원망스런 마음으로 차 있는 이가 있는가?

[12] 지금 당장은 이해 못하더라도 때가 되면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까지 변함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아멘!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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