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이순실 집사
탈북민 이순실 집사 ©‘에스더기도운동’ 영상 캡처

에스더기도운동이 주최하는 ‘22차 청소년 지저스 아미’ 마지막 날인 지난 7일 오전 탈북민 이순실 집사가 ‘죽음의 사막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간증했다

이순실 집사는 “2007년에 대한민국에 왔다. 와서 보니까 대한민국은 정말 천국이다. 이 천국에 빈 주먹, 맨발로 와서 이만큼 성장하기까지는 다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으로 된 것이다. 저는 평양시 낙원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인, 어머니는 군단장 요리사였다. 나름 괜찮은 집안인데도 TV 한 대도 없고, 옷장도 없이 폭약상자 같은 데다 짐을 꾸려놓고 살면서 계속 이사를 다녔다. 소학교 4학년 이후 황해북도 평산으로 이사 왔다. 평양이나 지방이나 주체사상 교육은 똑같은데, 가정교육이 달라진다. 지방에 오니까 부모님이 제일 먼저 가르쳐주는 게 도둑질이었다. 북한에선 아버지의 직업이 대물림되는데, 아버지는 군대에서의 생존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주셨다. 길을 가다가 저 집에 옥수수, 호박이 달렸다는 정보를 주면 오빠와 동생과 나는 몰래 훔쳐 오는 것을 배웠다. 이게 바로 사는 방법이라고 도둑질부터 가르쳤다”고 했다.

이어 “군대에 가서 부모님이 왜 그런 교육을 했는지 정확히 알았다. 군대에서 해만 지면 여군들도 조를 짜서 도둑질을 내보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먹고 살아야 하므로 도둑질이 큰 의미가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 입대한 아이들은 고추, 호박, 오이를 따면서도 무서워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산 교육을 받았기에 개, 토끼, 닭을 훔쳤다. 도둑질 잘해서 중대장도 빨리 됐고 입당도 빨리 하고, 표창도 받았다. 도둑질을 못 하면 사람질 못한다는 취급을 받았다. 군 복무 만 10년 동안 제일 잘한 것은 도둑질 하나였다” 했다.

이 집사는 “군대에서 간호원을 하면서 제일 많이 치료한 것은 영양실조 환자였다. 국가에서 보급해야 하는 물자가 공급이 안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도 잘 먹고 잘 살았다. 서서히 공급을 못 하니까 군대에서 도둑질을 해서 먹으라고 명령했다. 인민군대가 도둑질해서 먹는 건 도둑이라고 쫓는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

이어 “1년 더 충성의 군사복무를 하고 11년 만에 집에 처음 왔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사고로 다 돌아가셨다. 전화도 없고, 기차가 마비되니까 우편물도 못 받아서 돌아가신 것도 몰랐다. 부모님만 믿고 집에 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살아낼 길을 찾아내야 했다. 동생은 부모님이 쓰던 세간살이를 다 팔고 꽃제비를 나갔다. 나도 제대할 때 입고 온 군복을 팔아 빵을 바꿔 먹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양강도 해산까지 왔다. 군대에서 실컷 했던 도둑질을 또 하면서 잡히면 매도 엄청 맞고 가난 때문에 억울한 매도 많이 맞았다”고 했다.

그는 “부끄럽지 않은 게 나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 많았다. 전국의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꽃제비 대열이 양강도 해산에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많은 제대 군인들이 꽃제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국가에서 집은 배정해주지만, 월급을 안 주니까 저금도 없고, 배급을 안 주니까 먹을 게 없었다. 대한민국엔 뭉치면 산다는 말이 있는데, 북한은 뭉치면 죽는다. 엄마가 배고픈 내 새끼들 불쌍하다고 꼭 끼고 앉아있으면 다 죽는다. 아이가 엄마 젖을 떼고 걷기 시작하면 아침에 눈만 뜨면 다 내보낸다. 스스로 알아서 역전, 장마당 등 사람이 모이는 근처에서 빌어먹고 훔쳐 먹고 주워 먹으면서 산다”고 했다.

이어 “인민군 장교로 별을 두개 단 중위에 20대 청춘에 건강하고 두 다리와 두 팔이 성한 사람이 거지가 되었다. 양강도에는 중국에서 쌀을 싣고 오는 자동차가 왔다갔다 하니까 떨어지는 쌀알, 콩알이라도 주워먹겠다고 전국 거지가 다 몰려왔다. 아이들도 얼마나 많이 온지 모른다. 아이들이 여름은 괜찮은데 겨울엔 다 얼어 죽는다. 손가락을 하도 빨아서 손가락뼈에 가죽만 쓰여 있는 아이들이 역전, 장마당에 널려 있었다. 가마니를 덮어쓴 걸 보면 다 아이들 시체였다. 부모도 없이 혼자서 맨발로 옷도 못 걸치고 돌아다니며 주워 먹다가 죽은 아이들”이라고 했다.

이어 “나도 죽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1997년부터 중국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압록강을 넘으면 중국 변방대에서 공안들이 나와서 다 잡아서 북한으로 보내버린다. 북한은 배가 고파서 중국에 가서 얻어먹고, 조국이라고 건너온 자국민을 잡아서 때리고 가둬 놓고 분리해서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저도 보위대에 끌려가서 엄청 많이 맞았다. 보내주면 또 잡혀서 매를 맞는 게 2007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졌다”고 했다.

이 집사는 “8번 출소했을 때 집에 가니까 오빠가 고생하지 말라고 친한 친구에게 시집을 보냈다. 오빠네 집보다 더 못사는 집이었는데, 빈손으로 와서 쌀만 축낸다고 구박과 천대가 말이 아니었다. 7개월 만에 도망 나왔는데 임신한 줄도 몰랐다. 배는 점점 불러오는데 아기 낳을 자리가 없었다. 목욕도 세수도 못 하고 이도 못 닦고 그저 숨 하나 쉬면서 오직 먹을 것만 찾아다니는 벌레, 짐승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지 꽃제비 엄마가 아기를 낳는다고 불쌍하다고 욕하면서 도와주는 손길이 없었다. 할머니 한 분이 해산을 도와주고 빨리 시장으로 가라고 했다. 시장 정문 앞에 앉아서 한쪽 팔에 아이를 안고 한 손은 하늘 높이 들고 ‘5전만 주세요’, ‘먹다 남으면 주세요’ 이렇게 3년을 벌어먹었다”고 했다.

이어 “등에 업힌 아이가 3살이 되니까 철이 들어버렸다. 3살, 5살된 북한 아이들이 철들어가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엄마가 아무리 구걸해도 한 푼도 안 들어오는 걸 알기에 세 살짜리가 잔등에 업혀서 엄마를 벌어 먹였다. 맥없이 가만있다가도 사람들이 먹을 것을 들고 가면 두 다리 두 팔을 휘저으면서 배고프다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천 번 만 번 해야 누가 동정해서 국물이라도 얻어먹기에 세 살난 아이가 잔등에서 피눈물 나게 울었다. 철드는 아이가 너무 가엾고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아이를 배낭에 넣고 중국으로 넘어왔다가 중국 인신매매단에 걸렸다”고 했다

이어 “엄마랑 헤어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아이가 내 눈 앞에서 팔렸다. 장마당에서 개, 고양이를 흥정하듯이 아이는 중국 돈 3천 원에 나는 중국 돈 5천 원에 팔려 갔다. 그때부터 정신병자가 되어버렸다. 바람소리도 아이가 엄마를 찾는 소리 같았다. 팔려 가서 한달 만에 다시 도망쳐 나와 찾아간 곳이 십자가가 달린 교회였다. 십자가 달린 곳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잡혀가지 않게 보호해주고 관리해준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교회엔 저까지 7명의 탈북자가 있었다. 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며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기도를 듣는다면 북한을 저렇게 못 살고 굶어 죽는데 가만히 놔두겠냐며 하나님 소리하는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교회에서 6개월을 지냈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면서 설교할 때만 앉혀두었다. 그때 조금씩 하나님, 주님, 예수님 이런 단어가 들려왔다. 무서운 게 북한에선 공개처형 1순위가 예수님, 하나님을 전하는 자, 이름을 부르는 자였다. 잡혀가면 총살이기에 서로 예수 믿었다는 소리는 하지 말자고 7명이 약속했다. 어느 날 목사님께서 빨리 짐을 싸서 새벽에 피신하라며 여비와 배낭을 주면서 한국으로 가라고 했다. 잡히면 죽을 생각으로 시장에서 낚시 바늘 세 개와 쥐약 세 봉지를 사서 속옷에 감췄다. 목사님은 심장 속에 아멘을 새기고, 주님, 예수님, 하나님을 부르면서 가면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누구를 통해서든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꼭 구원해줄 거니 계속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했다.

이후 중국 국경선을 넘었다는 이 집사는 “길도 모르고 모래와 바람밖에 없는 고도 사막에 들어왔다. 안도가 되니까 목마름과 배고픔이 시작됐다. 배고픈 건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기에 참을 수 있었는데, 물 한 방울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이제 죽는 것 밖에 없으니까 목사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데 속은 셈 치고 기도해보자고 했다. 7명이 앉아서 물 좀 먹게 해달라고 살려달라고 한 마디를 시작하는데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그때처럼 간구하는 기도는 한국에서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이제 죽었다고 누워 있는데, 총을 든 몽골 군인 세 명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옷을 뒤지더니 낚싯바늘과 쥐약을 보자 탈북자라는 것을 알고 체육관에 데려갔다. 문을 열어보니까 앉을 자리도 없이 좁은 체육관에 탈북민 500명이 갇혀 있었다. 게르라는 천막으로 우리를 데려갔는데, 여자 세 명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는 걸 봤다. 우리가 교회에 있다가 왔다는 소리에 반가워하면서 이곳에 있는 무리들이 안전하게 한국에 가게 기도하자고 했다. 그때 사막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알았다. 여기서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또 도와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하나님께 무조건 한국가게 해달라고, 살려달라고 기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게르에선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데 체육관에선 툭하면 싸움이 일어났다. 군인들이 착한 무리를 먼저 뽑아서 한국에 보내야 남은 사람도 착하게 살 것이라며 우리를 시범으로 뽑아서 한국에 먼저 보냈다. 다른 사람들은 5~6개월 만에 한국에 왔는데 우리는 45일 만에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순실 집사는 “도망치고 갇혀 사느라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한국에 와서야 아기를 잃은 것이 실감나서 또 정신병자가 되었다. 아기들 옷 가게, 신발, 유모차를 보면 계속 눈물이 나왔다. 컴컴한 방에 커튼을 치고 울며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 가면 무조건 교회를 찾으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텅 빈 교회에 앉아서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는데 탈북의 과정이 쫙 보이면서 죽음의 사막에서 만난 하나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부터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국에 가면 한국에 계신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했는데,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내 새끼 잃어버린 게 이제 생각난다고 종일 울면서 기도했다”고 했다.

이어 “그다음 날 하나님께 이제부터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께 신세를 갚기 위해서라도 교회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 앞에 자주 오겠다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친 딸의 대화 같은 기도를 시작했다. 아버지 앞에서 어리광 부리듯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살리셨다는 것, 사막에서 만난 하나님이 진짜 내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두운 장막을 다 열고 깨끗이 청소와 목욕을 하고 교회에 다니면서 식당봉사를 시작했다. 북한 음식을 이것저것 만드는데, 맛있다고 하니 그 재미에 교회에 새벽같이 나가서 청소하고 식당 관리를 내가 다 했다. 너무 살맛이 났다”고 했다.

이어 “뒤돌아보니까 나랑 같이 온 탈북민들이 내가 빠졌던 수렁에 빠져 있어서 교회에 데리고 갔다. 이들이 지금도 전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마음고생 한 사람들을 위로해주면서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 걸 느꼈다. 돌아보면 내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불쌍해서 하나님이 돌봐주시는 게 아니다. 밖에서 짐승처럼 살던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걸 안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우리가 쓸 데가 있고, 하나님께서 계속 일을 시키는 걸 느낀다. 천리든 만리든 부르는 곳에 아멘으로 간다”고 했다.

이 집사는 “허구한 날 앉아서 배고프다는 소리를 몇십 년 하던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전도 잘하고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은 다 성공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도 모르고 하나님 주시는 양식을 먹으면서 다 내 능력인 줄로 안다.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이걸 알기 때문에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저처럼 속은 셈 치고 믿어보면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 축복의 땅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아침에 눈 뜨면 하나님, 예수님께 감사하며 살자.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꽃제비 엄마에게 이렇게 큰 축복을 주셨다. 꽃제비 엄마가 한국에 와서 김치 공장, 떡 공장, 순대 공장을 하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이렇게 축복으로 다 채워 주셨다.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기도하면 다 이뤄진다. 기도 많이 하고 축복받기 원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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