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교수
김재성 교수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논쟁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 “능동적” 이라든지, “수동적”이라는 수식어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물론 정확히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개념이나 문자나 글자, 그런 용어와 일치하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가 아무런 공식이나 원리도 추출해 낼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던 물건들과 현상들이 등장하고 있어서, 매일같이 새로운 단어와 이름을 붙혀야만 소통이 가능하게 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종교개혁자들과 17세기 개혁주의 정통신학자들이 채용했던 “교리적 용어들”은 당시 신학자들의 인식론과 시대적인 정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시대의 철학과 인식론, 진리 체계와 감정, 정서들이 녹아 있어서, 무작정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지 않는 신학 용어를 채택하여 성경의 독특한 진리를 압축하는 것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성경에 그런 단어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할 일은 아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라는 용어도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세 위격을 가진 한 분 하나님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는 단어도 성경에 없지만,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용어를 채택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예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본다면, 아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창조주이자 통치자요 전능자이신 여호와, 엘로힘이라는 성호를 “하나님”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God”이라는 영어단어에 적합한 한국어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어와 한국어에 출중했던 카나다 출신 제임스 게일 선교사(James Scarth Gale, 1863-1937)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최초 한글 성경번역 사역에 참여한 어학의 천재로서, 그는 전능하신 창조주에 합당한 단어가 전혀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기존의 단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선교사들은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천주” “상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니 이것을 채택하자고 했지만, 게일 선교사는 토착화가 너무 심해서 결코 성경에 나오는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에 합당한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므로 “유일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하나”와 극존칭어 “님”을 결합시켜서 “하나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이처럼 성경에서 직접 찾아볼 수 없는 단어를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참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신학적인 단어들이 성경 밖에서 사용되는 것들인데 무조건 배척할 일은 아니다.

아무튼 성경에 없는 “수동적” 혹은 “소극적”이라는 용어가 빚어낼 오해를 염려하여, 레이몬드 교수가 신중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결단코 하기 싫어하였거나, 억지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즉 강압적으로 끌려가서 피동적으로만 순종한 것이 아님을 현대적으로 표현할 방안을 강구했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자원하고 전적으로 염원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교훈적 순종” 혹은 “명령적 순종”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하였다.

미국 커번넌트 신학대학원 피터슨 교수는 능동적 순종을 “일생 동안의 순종”으로, 수동적 순종을 “십자가 상에서 죽음의 지점까지의 순종”으로 약간 보충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처럼 두 용어에 대한 보충적인 해명들을 하는 이유는 16세 말에 두 가지 순종을 강조하던 세대와 오늘 우리들의 시대 사이에, 언어 상에서나 철학적인 인식론에서나 많은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지만, 아예 순종의 본질을 왜곡하면서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거나, 수동적 순종을 비판하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고,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칭의와 전가 교리에 대해서, 종교개혁 이후로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놀라운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벨직 신앙고백서” (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156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7)을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칭의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전가교리를 가르쳤다. 루터와 칼빈을 위시해서, 위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칭의교리와 의로움의 전가교리를 공통적으로 제시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로마 가톨릭과 왜곡된 개신교 신학자들에 맞서서 칭의 교리와 의로움의 전가를 정립한 종교개혁 후기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에 이르러서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중요한 기초로 채용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연구의 마지막 장에서 신학적인 발전과정 부분에서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를 처음 사용한 신학자가 마틴 루터였고, 개혁주의 정통신학자들이 전가교리의 토대를 구축했음을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개혁주의 정통신학에서 정립해 온 칭의론과 전가교리를 정립하면서, 그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하여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을 중요하게 다뤘다. 칭의와 전가교리의 핵심이자 기초로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대한 설명을 할 때에, 이미 루터가 펼쳐놓은 칭의론의 터 위에서 발전해 나왔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결코 왜곡된 용어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제시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다 더 넓은 안목에서,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칭의 교리와 그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 교리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 핵심에 있는 칭의의 기초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음으로 전가받는다는 교리를 세우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완벽한 순종을 하였음을 의존하지 않는다면 결코 불가능하다. (끝)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본지는 필자와 출판사의 양해를 통해, 필자의 책 서론과 제1장을 연재했습니다. 신문에서는 각주와 인용문들이 없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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