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고난, 그 미스터리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코로나로 세상은 평안하지 않다. 직접 그 고통을 당하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이 심할까?

20세기 들어 지난 1백여 년 동안 과학은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사람들에게 사람에 대한 많은 지식을 제공했다. 사람 몸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알게 되었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깊이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생각과 활동의 주체인 사람의 두뇌에까지 사람들은 조금씩 신비를 캐기 시작했다. 겨우 지름 1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뇌는 백과사전 1천만 권 분량의 책이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을 지녔다. 인간의 뇌는 3백만 년 이상 책을 보고 공부를 해도 다 채울 수 없는 수퍼 컴퓨터의 용량과 같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사람의 혈관은 어느 전자 회로보다도 정교하고 길어서 혈관의 길이가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돌 수 있을 만큼 길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 각자에게 주신 설계도인 유전자는 모두다 펼쳐놓으면 그 길이가 지구에서 태양을 10번이나 왕복할 수 있을 만한 길이가 된다.

심장은 평생 평균 25억 번을 실수 없이 고동치면서 평생 동안 40킬로 미터를 줄지어선 탱크로리를 다 채울만한 피를 쏟아낸다. 인간은 이제 복제 인간까지 생각해 낼 만큼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게 되었다. 사람은 마음과 육체의 많은 부분들을 치유하고 개선할 수 있는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아직도 그 미스터리를 풀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고통과 고난의 문제이다. 역사를 통해 인간은 죽음을 포함해서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진전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도 고난을 즐기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고난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고 있다. 성경도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같다고 욥기서의 저자는 탄식하고 있다(욥 5:7 참조).

더구나 이 고난과 고통은 너무 주관적이고 사람마다 다양한 경험이어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다. 도대체 이 고통과 고난이란 무엇일까?

고통에 대해 가장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먼저 류마치스와 통풍 환자들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나온 Elaine Scarry가 쓴 ‘The Body in Pain’이라는 류마치스 환자들의 경험을 쓴 책에 보면 <마치 송곳 끝으로 꼭꼭 찌르는 것 같다>, <칼로 뼈를 깎는 것 같다>는 등 자신의 고통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 설명이 되나 아무도 그 경험 자체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지는 못한다. 이 같은 고통의 호소는 당하는 사람의 언어(language of agency)이지 다른 사람이 느끼지는 언어로는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바로 이 류마치스와 통풍의 고통을 모두 당한 사람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순전히 개인적 소견으로는) 류마치스의 고통이 훨씬 심하였다. 하지만 필자 또한 그 류마치스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알릴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내 류마치스의 고통이 내가 일생 동안 앓았던 가장 고통스러웠던 감기와 몸살과 독감을 합친 것 같은 고통이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뿐이다(의사가 못 고친 나의 이 병을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다!). 그러니 아마 류마치스의 고통을 알고 싶다면 여러분들이 가장 크게 앓았던 독감과 감기와 몸살을 종합하여 상상하면 된다.

또한 사람에게는 동물과 달리 정신적인 괴로움과 육체적인 아픔이 함께 있다. 우리말은 이 둘을 함께 고통이라는 말로 나타낸다. 정신적 괴로움과 육체적 아픔은 분명 다름에도 이것 또한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철학도 의학도 어느 것도 이 고통의 정의를 내리지를 못한다.

사람마다 고통의 정도와 질도 다르다. 뜨거움과 차가움과 같은 감각이 어떤 사람에게는 강한 고통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그런 감각의 경험이 되기도 한다. 아무도 고통을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통과 고난은 너무 신비스러워 고통과 고난을 감하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 고난의 신비를 파고드는 것이 낫지 않을 까 싶을 때가 있다. 고통을 즐길 수는 없지만 고통의 의미라도 알고 싶은 것이다.

고통과 고난의 신비(우연과 진화론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고통)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우연한 진화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화가 맞다면 고통이 그치도록 진화되는 것이 옳았다고 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고통이 그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코티존”이라는 부신피질호르몬만 잘 분비되면 통증은 몸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이것의 분비를 차단한다. 이게 계속 분비된다면 일종의 마약이다. 그런데 오히려 60세 이상 한국 노인의 삼분지 일이 관절의 통증으로 고생하며, 4분지 일은 허리와 신경통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사람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진화론으로는 전혀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

고통을 악하게 이용하는 사람들

이렇게 고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모르나 사람은 고통을 이용하는 방법은 알아냈다. 사람은 범죄한 자들에게 고통을 댓가로 주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죄의 댓가로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다. 그렇지만 고통이 꼭 범죄자들에게만 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선한 사람들에게 고통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다. 고통을 주는 자보다 고통을 당하는 자가 상처도 받고 고통이 심하다.

고통의 경험을 그릇되게 쓰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경험한 어릴 적 작은 고통의 트라우마를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들이다. 연산군, 북한의 최고지도자 같은 사람들이다. 훗날 임금이 된 연산군은 자신을 훈계하기 위해 어린 자신의 종아리를 때렸던 스승 조지서를 처단하였다. 선을 악으로 갚은 것이다! 김정일은 자신의 등극을 반대한 자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최근에는 북한 화폐 개혁을 주도한 사람을 공개 처형하였다. 가장 미성숙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신기한 고통

여기 자발적 고통을 당한 두 분이 있다. 고통의 문제를 잘 알던 두 분이다!

한 분은 석가모니이다. 불교만큼 고통의 문제에 매달린 종교도 없다. 불교에는 108번뇌뿐 아니라 4고, 5고, 7고, 8고, 11고, 16고, 19고, 110고가 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요 늙는 것이 고통이요 병나는 것이 고통이요 죽는 것이 고통’이라고 했다.

단순한 고통뿐 아니라 인간이 지니는 모든 부정적 경험의 해결을 추구한 분이 석가모니였다! 인생무상, 공허함, 죽음, 괴로움, 슬픔이 도대체 무어냐 하는 것이 석가모니의 화두였다! 석가는 그것을 위해 스스로 고통을 택하였다! 일국의 왕자 자리와 처자식까지 등지고 출가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한 번은 어느 아기 어머니가 석가를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아기를 좀 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석가는 아무도 죽은 일이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얻어 오라고 하였다. 사람이 죽은 적이 없던 가정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집을 찾지 못한 여인에게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여! 그게 내가 겨우 찾아내어 네게 줄 수 있는 진통제다. 슬픔은 그저 나누면 한 사람에게 적게 돌아간단다!”

석가모니는 자발적 고행을 시작한 출가자였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던 천재요 수퍼맨이었다! 하지만 그가 겨우 찾았던 수행방법이란 오직 자신을 위한 자발적인 고행 수련법뿐이었다! 법정 승려도 그를 따른 탁월한 수행자였다. 하지만 그도 자신을 찾아온 폐암의 고통을 막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여기 그와 전혀 다른 가장 신비스런 고통을 당하신 분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었다! 예수는 고통에 대해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신 분이었다. 심지어 죽음과 지옥의 고통까지 아신 분이었다. 그분이 고통을 당하신 것은 석가모니와 차원이 달랐다. 예수는 일부러 고난과 고통의 사람으로 오셨다. 죄 없이 고통을 지시려고 고통 없는 세상을 위해 고통 있는 세상으로 오신 분이었다.

고통과 고난의 근원 죄

태초에 고통과 고난이 창조 된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고통과 고난의 근원이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성경은 곧 고통은 죄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 고통을 대신 지시러 오신 분이었다. 고통 없는 세상을 위해 고통의 세상으로 오신 분이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했다.

구약 제단의 제물 즉 짐승의 피는 성문 밖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우리를 의(義)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고통을 제거 받지 못한다. 죄 값을 치러야만 한다. 사람이 세상에서 범죄하면 육적 사회적 제한을 통해 어느 정도 고통을 감내해야 되는 것과 유사하다.

영어의 고통이라는 단어 pain은 라틴어로 poena(벌)에서 유래한다. 고통은 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단어에서 poenitentia(회개)라는 단어가 왔다. 벌은 당연히 고통스러워야하며 회개는 벌과 관련되어 있다. 세상의 벌은 세상의 처벌로 가능하나 하나님께 지은 벌은 갚을 길이 없다. 갚는 방법을 사람이 모른다.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처벌하시고 회개하시기를 바라는지 전혀 모른다. 알아도 그것을 해결할 사람도 없을뿐더러 다른 이를 위해 짐을 질 사람은 더더구나 없다.

예수님은 그 처벌을 대신 짊어지시러 오신 분이었다. 짐만 지는 게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다! 그는 자기가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히 3:18)고 헸다.

예수는 학벌(목수)과 지역 차별(나사렛 촌 동네 출신)과 기득권의 견제(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 등)와 왕따를 모두 당해보신 분이었다! 왕따가 힘든 이유는 억울하기 때문이다. 억울한데다 고통이 함께 오면 참기 힘들어진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런 억울한 왕따를 당하신 분이었다. 자존심이 상하실 대로 상하신 분이었다. 처절한 수치를 당하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려주려 오셨다!

고통과 고난의 자리로 가라(히 13: 13절)

그런데 예수는 예수 믿는 우리들도 고난의 자리로 가라하신다(히 13:13).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능욕의 자리로 나아가라하신다.

예수는 우리에게도 값진 고난을 요구하신다. 십자가 없는 승리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다. 십자가 신학과 부활 신학은 동전의 양면 같다 . 십자가 신학이 루터 신학이라면 부활 신학(Meditatio Futura vitae)은 칼빈적이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한 점에서 만난다. 십자가없이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 없다. 강조점만 다를 뿐 이 두 가지는 함께 강조되어야할 신학의 기초이다.

우리는 어떤 성문 밖으로 갈 것인가. 지금 우리의 고난의 자리는 어디인가! 우리는 오히려 예수 믿고 인정받는 시대를 살아왔다. 예수 믿으면 능욕은 커녕 대우 받는 시대에 살았던 것이다. 능욕 받을 곳이 없었다. 목사는 인기직이 되었으며 어느 새 크고 웅장한 교회 다니는 것이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자랑할 만한 일이 되었다. 요즘 교회의 어린이들이나 젊은이들은 능욕이 무슨 말인지 저차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코로나는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인류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엄청난 문명적 패러다임의 세계적 전환을 앞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해야 할까? 그리스도처럼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예수를 모르는 곳, 예수를 알 되 잘못 아는 곳으로 가라. 그리고 가서 능욕 받아라! 여기 능욕 받을 한 장소가 있다. 바로 선교의 길이다! 직장, 학교, 학문, 문화, 사회, 예술, 사이버 세계, 과학기술의 세계, 아프리카, 타 종교권 어디 든 그곳이 될 수 있다. 내가 가든지 내가 가지 못하면 누군가 보내든지 보내고 기도하든지 해야 한다. 예수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했다. 예수 십자가의 길처럼 우리도 능욕의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히 13:13).

창조 신앙으로 본 고통과 고난의 신비, 주님의 십자가!(히 13: 14-15)

왜 능욕과 고난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이 피조 된 세상에는 영원한 성이란 없기 때문이다(히 13: 14). 고통 없는 곳이 없다. 세상은 고통과 고난과 외로움의 나그네길이다! 고통 없는 자 누구인가? 대통령, 독재자, 재벌, 과학자, 의사, 교수, 박사, 남녀노소, 빈부귀천 고통 없는 자 누가 있는가!

우리는 이제 히 13장을 통해 기독교 창조 신학의 신비로운 절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십자가 신학과 고난의 신학과 약함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놀랍게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능욕의 신비가 담겨 있었다. 그 창조의 신비는 약함과 고난과 십자가에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예수의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담았다. 이 신비는 신앙의 안으로 들어와 보지 못한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다. 세상은 능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능욕의 신비를 모르고는 고통과 고난의 신비를 알 수도 예수를 알 수도 없다. 그럴 경우 죽음과 부활도 모르며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그만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코로나 극복이 전부가 아니다!

코로나를 정복한다고 이 세상에 진정한 유토피아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코로나를 넘어서도 이 세상에는 코로나 못지않은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들이 여전히 그득하다. 성경은 인생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해야 80이라 했다. 그 이후 인생은 흙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게 인생은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 공평하게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새로운 새 땅, 새 예루살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영문 밖 십자가 능욕의 길로 나아가신 예수로만 들어갈 수 있다.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라(히 13:13) 그때 우리의 고난과 고통과 수고와 눈물을 주님께서 씻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곧 오실 영원한 도성,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히 13:15).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조장, 조직신학)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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