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19세기 코펜하겐의 한 신실한 청년은 우울증과 불안으로 인해 그의 처음이자 평생의 사랑이된 약혼녀와 파혼을 하고는 남은 생애를 깊은 사색속에 고독하게 살다 갔다고 한다. 어쩌면 자의식이 강하고 직관력이 뛰어난 청년에게 있어서 맨 처음 사랑에의 확신은 그토록 위태로운 것이었는가 보다.

그랬다. 참으로 그랬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친 가족들, 처음 본 노을과 교회 종소리, 첫 눈, 첫 만남, 첫 아기... 아, 처음이란 얼마나 가슴 뛰는 소중한 기억들이었던가...!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나의 빛나던 처음은, 그 빛나던 처음은 어디에 있단말인가?

언젠가 타인의 임직식에 참석하였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자신의 누추한 변화가, 무디어져가는 소명의식이 민감하게 감지되어 남모를 슬픔이 밀려들었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첫 임직을 받기 전, 준비기간 동안 내내 자유함과 설레임 속에 기쁨의 감격이 충만한 가운데서 전혀 놀랍고 새롭게 주님의 신비로운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던 것을...

거룩하고 고요한, 정결한 새벽 빛으로 찾아오셔서는 나의 영혼과 육체에 지존자의 권능으로, 저항할수 없는 충만한 지복감으로 채우시던 주님! 영원의 시간으로 들어선 하나님의 나라... 잠잠히 나를 향하여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는 듯, 주님께 대한 나의 기쁨에 "오냐!" 하시며 화답하시듯 보잘것없는 나를 몹시도 대견히 기뻐하셨던 주님을...

이전에도 그러하였듯, 때때로 이렇게 주님과의 소중한 이야기를 과거지사로 추억한다는 것은 한편 스스로 몹시도 부끄럽고 슬프게 느껴진다. 마치 파혼해 가는 청년이 되어가는 것처럼...

세상에서의 만남은 늘 불완전하고 불안한 요소가 많기 때문에 이해관계와 긴장감이 동반된다. 나도 실수가 많고 상대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회피하고 싶은 본능이 일어나기도 하고 의기 소침해지기도 쉽다. 이런 감정에 순응한다면 결국은 현실도피나 은둔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에서마저 이런 긴장을 느낀다면 우리는 무거운자격지심으로 인해 주님을 회피하고 불안하게 주님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처음의 사랑이 퇴색될 것을 불안해 하는 삶은 너무도 환상적으로 심미적이고 또한 자기 학대적 삶이다.

역사상 소위 죽은 정통신앙(dead orthodoxy)이라 일컫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국교회 신앙이 주류였던 18-19세기의 유명한 천재적이고 예민한 예술가들이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저들중 적지 않은 이들이 주님과의 존재적인 만남을 체험지 못하고 관념적인 신성(神性)에만 몰입되었던 탓에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와 완벽한 신성에의 괴리를 극복치 못하고 평생 내적인 고투에 시달리다 불행한 말로를 맞은 경우를 본다.

그러나 저들이 알지 못하였던 우리 주님은 실제 어떠하신 분인가? 주님은 늘 우리의 눈높이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며 한결같이 자상한 눈빛으로 우리를 깊숙히 응시하시며 언제나 이렇게 반복해서 물으시는 분이시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은 우리가 파혼한 청년처럼 너무 생각이 심각한 것도, 너무 결벽적인 것도, 너무 조심한 것도 그리고 너무 자신의 몰골에 송연하여 위축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가 다소 경박하더라도, 뻔뻔하더라도, 모자라고 둔하더라도, 부모 품 속으로 한사코 파고드는 어린 자식들처럼 실패 속에서도 늘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만을 기대고 의지하길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주님과의 사랑은 어설픈 우리에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미덥고 보장된 사랑이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에는 어떤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 것을 경험한다. 또 이런 패턴이 우리 영성의 성숙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로 역기능적인 패턴은 자기 연민이나 자기 의, 자기 합리화등 늘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 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말씀을 매일 새롭게 먹는 것이다. 말씀이 늘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할때 안일하고 협소하고 비 생산적인 패턴을 우리는 과감히 시정할수 있다.

위의 청년의 평생의 과제였던 "영원한 자기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우리의 습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습관적으로 늘 기이한 주님의 빛을 사모하며 그 빛 안에 들어가 주님과의 교제가 새롭게 갱신되고 깊어지는 삶 속에서는 매너리즘이 차지할 자리란 없다.

에베소 교회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처음 사랑"을 시간의 개념에서 이해 한다면 우리는 파혼할 수 밖에 없었던 청년처럼 또 불안해지고 절망하기 쉬울 것이다. 언젠가는 퇴색될 것이라는 사실이 당연한 것이므로... 그러나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전 1:10)"는 말씀이 시사하는 바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로의 열림이지 가시적인 세계의 마침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 안에서 "처음 사랑"이 날마다 체험될 때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날마다 새롭게 그 빛나던 처음 같이 부활하는 것이다.

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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