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와 성전환증, 어떻게 볼 것인가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사도 바울의 눈으로 본 동족 이스라엘

사도 바울이 볼 때 조상 이스라엘(야곱)과 그 후손들은 참으로 큰 복을 누린 사람들이었다. 야곱의 자녀들(유대인들)을 하나님은 아들(양자)로 삼으시고 자기 영광을 그들을 통해 나타내셨으며 그들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주셨다(롬 9:4). 그들은 다른 민족과 달리 성전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받은 약속이 있는 훌륭한 조상들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리고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영원히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조상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롬 9:5).

이렇게 율례를 받고 육신으로 그리스도가 나신 이 민족은 육적·지상의 복까지 누렸다. 인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각종 노벨상 수상자들의 3분지 1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이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유대인 출신 각종 세계적 인물들을 열거해 보더라도 화가 샤갈, 코미디언 채플린, 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아인시타인, 철학자 스피노자, 프로이드, 에릭 프롬, 음악가 바그너, 쇼팽, 멘델스존, 세계적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마르크스 등등 끊임이 없다. 인구는 겨우 우리 민족의 5분지 1에 불과한 민족이라는 것이 정말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신의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큰 슬픔과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있다고 했다(롬 9: 2).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였다. 만일 내 종족이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롬 9:3)고 고백한다. 실로 사도 바울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고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같은 이 민족의 뿌리가 바로 창세기 후반부(48-49장)에 걸쳐있다. 도대체 이 민족을 통해 성경이 주려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 깊은 영적 진리를 살펴보자.

이스라엘의 장자(창 48: 12-16절)

야곱의 육적 장남은 르우벤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르우벤이 아닌 요셉의 자녀들을 먼저 축복한다. 요셉은 상식의 질서대로 육적 장남 므낫세가 아버지 야곱에게 더 관심을 받고 축복을 누리기를 원했다. 아버지 야곱에게 절 한 후 요셉이 큰 아들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쪽에, 에브라임을 왼쪽에 앉힌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른손은 권위의 손이었다. “우수”(右手, 창 48:13, 히브리어 “yamin”은 오른손이란 뜻)은 이스라엘에서 힘과 권위와 축복과 선을 상징하였다. 장남 므낫세가 할아버지 야곱의 오른손으로 안수 받아 더 큰 복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달랐다. 야곱은 자신의 손을 서로 교차하여 손자들의 머리에 얹는다. 즉 요셉의 둘째 아들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에브라임이 더 큰 복을 누리기를 기원하였다. 야곱은 자신의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은 야곱 자신을 출생할 때부터 기르신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요 자신을 모든 환란에서 건지시는 구속의 하나님이었다고 기도한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의 아이에게 복 주시고 번성케 하시기를 기도하였다(창 48: 15-16).

진정한 이스라엘의 장자는?(창 48: 17-19절)

요셉은 장남 므낫세가 당연히 더 큰 복을 누리기를 원하였다. 아버지 야곱이 에브라임에게 더 큰 복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모습을 본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즉각 항의하였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눈이 나쁘고 정신이 흐려져 실수 한 걸로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요셉의 단도직입적인 항의에는 그와 같은 늬앙스가 일부 풍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향한 자신의 손을 만류하고 옮기고자 한 요셉의 권면을 야곱은 거절한다. 사람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르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장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아들 요셉과 아버지 야곱이 자녀를 보는 눈은 달랐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눈도 사람들과 당연히 다르다. 사람과 교회와 믿음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이 보는 눈은 다름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알렉산더, 나폴레옹, 징기스칸, 율리우스 시저, 처칠 등을 세상 영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세계 영웅들은 달랐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 엘리야, 스데반, 삭개오, 모세, 바울, 막달라 마리아, 거지 나사로, 루디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베드로 등을 영웅으로 보았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있고 죽은 자 같으나 산 자가 있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은 자가 있다(고후 6:8).

어떤 이스라엘의 축복인가(20-22절)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이 복의 상징이 되어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복을 빌 것이라고 예언한다. 어쩌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당시 애굽 총리 요셉의 아들들이었으니 이미 세상에서 사람들이 최고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굽은 요셉과 그 후손들의 진정한 본향이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요셉의 후손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후손들은 조상 아브라함처럼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다가 언젠가 조상의 본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 나그네처럼 살다가 영원한 본향으로 갈 것이다. 그것이 요셉 후손들에게 준 야곱의 마지막 당부였다.

모든 것이 야곱의 축복이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선 한 뜻에 달려 있다. 사람의 뜻대로 모든 게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장남 므낫세보다 동생 에브라임이 더 크게 될 것임을 야곱은 분명히 알았다. 성경대로 에브라임의 후손들은 므낫세 후손들보다 더 번성한 지파가 된다. 출애굽의 광야 집결 시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보다 규모가 커진 것을 볼 수 있다(민 1:32-35, 2:18-20).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구원 기도에서도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보다 먼저 호명 받았다(시 80:2). 모세의 수제자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였고 북이스라엘의 설립자 여로보암이 바로 에브라임지파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더욱 큰 평가를 기억하라! 요셉 가족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사람들 각자가 받는 복은 모두 다르다. 천국에서도 상급이 있고 면류관이 다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다르고 요셉과 그 형제들이 받은 복이 달랐다. 돌아갈 아모리 땅 즉 가나안 땅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평가서가 있음을 기억하라! 진정한 최종 평가는 요셉도 아니요 야곱도 아니요 사람들의 평가도 아니다. <영적 가나안 곧 천국>에서 창조주이시며 구속의 주이시며 심판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평가가 있음을 기억하라. 이렇게 <육적 장자>와 <신앙의 장자>는 전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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