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이정배 교수(생명평화마당 공동대표, 평통기연 운영위원)
칼럼니스트 이정배 교수(생명평화마당 공동대표, 평통기연 운영위원)

영화 <귀향>과 <동주>를 가슴 아프게 보았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두 편 모두가 식민지 시대를 배경한 것으로서 앞의 것이 무지렁이 딸들의 이야기라면 나중 것은 주권을 잃은 이 땅 지식인들의 고뇌를 담았습니다. 무참하게 짓밟힌 몸을 벗고 혼(魂)으로 고향을 밟은 어린 소녀, 아니 우리들 할머니의 이야기에 남녀노소불구하고 몇 백만의 관객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서정적인 것으로만 알았던 동주의 시(詩)가 저항의 산물인 것을 알게 되었고 수천에 달하는 일본 유학생들 역시 이 땅을 사랑하다 이름 없이 죽어간 것도 지켜봤습니다. 영화 내용 뿐 아니라 제작 과정 역시 큰 감동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헌금했고 배우들 역시 자신들 재능을 순수하게 기부했던 탓입니다. 위안부를 연기했던 배우들 중에 재일교포 소녀들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들 가슴을 저리게 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겠으나 이들 영화가 일본의 사죄를 염원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슬픈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간 사건과 시기적으로 맞물렸기에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사자들의 바람을 외면한 채 일본 아베정권과 ‘불가역적’이란 폭력적 언사를 앞세워 우리들 과거사를 홀대한 현 정권에 대한 민초들의 분노와 저항의 표출이겠습니다. 독도를 일본 땅이라 기술한 고등학교 교과서 비율이 70%를 훌쩍 웃돌았고 위안부란 말을 사용한 중학교 교과서가 0.5% 정도라 하니 이것이 바로 ‘불가역적’ 담판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두 영화가 증언하듯 우리들 과거사가 존재하는 한, 가해자의 사죄 없는 외교적 해결은 무효입니다. 피해자인 우리들의 용서를 통해서만 풀어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결코 망각해서는 아니 될 일이겠지요. 우리들 기억까지 불가역적이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렇듯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자신을 버려 독립을 염원했다면 분단시대를 사는 우리들 역시 지금 통일을 염원해야 옳습니다. 식민시대 속에서 독립의지 없이 순응하며 살았던 사람을 낯설어 하는 우리가 분단 조국 하에서 정작 통일의지의 실종을 놀라워하지 않는다면 후대의 역사가 뭐라 할지 걱정스럽습니다. 말로는 통일을 원한다 하면서 실상은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이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위정자들이고 이 땅의 교회들입니다. 개성공단까지 폐쇄하며 세계로부터 북한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는 남북 간에 ‘다리’가 아니라 ‘벽’만을 더욱 곤고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럴수록 주체적 입지를 축소시키는 정부의 통일정책이 안타깝습니다. 한 세기 전처럼 그렇게 目下 한반도는 이웃 강대국들의 실리(實利)가 상충하며 각축되는 공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從美, 從日하는 이들이 더 많은 정치현실에서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시대의 역적, ‘종북(從北)’으로서 내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귀향>과 <동주>를 보고 가슴아파한다면 통일운동을 우리 시대의 독립운동이라 여겨야 마땅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교회가 자신들 수치심을 벗기 위해 반공주의에 앞장섰다는 분석이 일리(一理)있습니다. 교파를 막론한 대형교회들이 대개는 반공주의에 앞장섰던 것이 사실입니다. 번영신학으로 성공한 이들 교회가 지킬 것이 많아짐으로 기득권 세력이 되었던 탓입니다. 교회가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는 것은 그 속에 복음이 사라진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복음화에 앞서 교회 복음화가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교회 복음화 없이 세상 복음화는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이 땅의 통일 역시 교회의 복음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과제라 믿습니다. 어느 경우라도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 우리들 숙제인 바, 통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서 세계사를 위해 민족에게 맡긴 책무인 까닭입니다. 주지하듯 3.1 운동 당시 교세가 약했던 개신교는 천도교로부터 독립자금을 지원받아 선언자 33인 중 절반에 이를 만큼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천도교의 물적 토대가 없었다면 개신교의 독립운동은 오늘의 역사를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독립운동이 이렇게 시작되었기에 향후 통일 운동에 있어 개신교의 역할은 더욱 지대해져야 옳습니다. 무엇이 통일운동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리들 몫이 된 것입니다. 아마도 ‘교회의 복음화’를 위한 노력이 우선이겠지요. 또한 새 술(신학)을 담기위한 새 포대(교회)가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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