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김민수 목사(들풀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실화입니다.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분신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런 중에 어느 어머니도 아들을 잃었고 너무 상심한 나머지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구의 위로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1970년 11월 노동운동을 하다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호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위로가 아닌 꾸짖음, 그런데 그 어머니는 이소선 여사의꾸짖음을 듣고서야 비로소 울음을 그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위로하는 사람은 위로받는 사람보다 더 큰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며느리의 심정은 며느리가 알고, 과부의 심정은 과부가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동감입니다. '같은 느낌'입니다. 개그프로그램 중에 나온 유행어 중에서 "느낌 아니까" 하는 것, 그것이 동감일 것입니다. 물론, 역대 대통령 중에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하는 말을 많이 하신 분이 있는데, 그건 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해 봤는데, 그런 경험을 해봤는데 당신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왜 당신은 그렇게 하니까 안된다는 식의 훈계이기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꽃 한송이가 없네>라는 사진전을 다녀왔습니다.

저와도 알고있는 80이 넘은 사진작가인데, 9년동안 암투병하는 아내를 간병하며 수천장의 사진을 찍었고, 그 중에 25점만 추려서 전시회를 연 것입니다. 사진보다는 국문학자였던 사진작가의 글에서 저는 동감을 했고, 공감해서 한동안 그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식물이 시들어가는지점을 조위점이라 한다. 수분이 빠져나가고 이파리 끝부터 차츰 말라간다. 흔들림 없던 줄기가 굽어가고 메마른다. 물을 주어도 되살아 날 수없는 지점인 영구조위점을 넘기면, 다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내는 조위점을 넘긴 식물 같았다(윤철중 – '꽃 한 송이가 없네' 사진전 초대글 중에서)

'조위점'이라는 단어가 저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사진적인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푼크툼'입니다. 언젠가도 이 단어를 주제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푼크툼(Punctum)은 라틴어로 뾰족한 도구에 의해 상처난 상흔을 가리킵니다. 화살촉처럼 아주 작은 세부가 어느 부위를 찔러 상처를 입히는 아픔이지요. 아주 작은 세부가 느닷없이 날아와 그것에 찔려 상처 입은 흔적이 푼크툼입니다. 이 작은 상처, 그런 점에서 널리 인정되는 '스투디움'과는 다른 개인적인 차원이 푼크툼입니다. 진중권은 '일반적인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를 푼크툼이라 정의했습니다.

조위점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나를 찔러 상처를 낸 이유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머니와 관련된 최근의 일들때문입니다. 어머니에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조위점'이라는 단어가 내게 푼그툼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도 사진작가의 아내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래서 나는 공감했고 동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감할줄 아는 사람,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외자녀로 자라면서 생기는 문제중 하나가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일베들의 폭식투쟁이나 서북청년단재건위의 행동이나 어버이 연합, 엄마부대 등은 모두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숨진 유족들의 아픔을 동감하고 공감할 줄 모르는 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보수적인 정치성향에 공감하므로 옳지 못한 행동,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비윤리적인 일들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의 겸손, 그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 그분이 육체를 입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말씀에서 저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동감,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먼 발치에서 공감하고 동감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공감이란 함께 있는 가운데, 심지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야 비로소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입지 않고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구원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 동감할 수 없었던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고 저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에, 공감하시기 위해 화육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몸과 다르지 않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으로 인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감하고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지금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이 땅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공감하시기 위해 부활 후 갈릴리로 가신 것처럼 아파하는 현장에 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아파하는 곳으로 가야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수백억 건축비를 들여 지은 그런 교회로 가실까요? 아니면, 맨날 반공설교나 하는 그런 교회에 가실까요? 아니면 헌금이나 강요하고 아멘이나 강요하는 그런 교회에 가실까요? 그런 이들과 공감할 일이 있으시기나 할까요?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 앞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앞에서, 우리가 겪는 아픔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공감하고, '하나님과 내가 같은 느낌입니다! 동감입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ㅣ김민수 목사(들풀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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