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 감리교 선교사와 해리스 감독
1898 감리교 선교사와 해리스 감독 ©아펜젤러기념사업회

Ⅰ. 들어가는 말

 

H. G.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85년 내한한 이래 1902년 44세의 나이로 순직하기까지 연례보고서, 편지, 논설, 일기 및 메모 등 방대한 양의 선교 기록을 남겼다. 본 논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핵심 대상은 그가 남긴 국내 선교 탐방 여행 일기이다. 필자는 2020년과 2021년, 아펜젤러와 G. H. 존스(George Heber Jones) 선교사의 중·남부 선교 탐방 여행 일기를 편역하여 소개한 바 있으며, 이후 전 기간에 걸친 국내 선교 여행 일기를 수집·정리하고자 지속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왔다.

아펜젤러의 국내 선교 여행은 내한 2년 차인 1887년 봄의 1차 선교 탐방을 시작으로, 1898년 3월 평양 방문에 이르기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단, 1898년 9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 방문 후 귀환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원산~서울 간 여정(10월 3일~10월 7일)을 포함할 경우 총 7차례의 국내 선교 여행으로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7차례의 국내 선교 여행 일기 가운데 발굴 및 번역을 거쳐 공개된 것은 1차, 5차, 6차, 그리고 7차 여행 일기에 불과하다. 나머지 일기의 경우 전문(全文)이 발굴되거나 소개되지 못한 채, 연례보고서나 동행자의 여록(旅錄)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아펜젤러의 국내 선교 탐방 여행 일기 7편의 현황과 특성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나아가 기존 연구에서 그간 잘못 서술되거나 혼선이 있었던 제5차 선교 탐방 관련 사료를 중심으로, 특히 ‘경기도, 강원도 순행 일기’에 나타난 오류를 학술적으로 비평하고 이를 올바르게 고찰·정립하는 데 본 논고의 목적이 있다.

Ⅱ. 아펜젤러의 7차례 선교 탐방 일기 개요

1차 여행: 1887년 4월 13일~5월 12일, 헌트(J. H. Hunt)와 송도를 거쳐 평양까지

2차 여행: 1888년 봄, 언더우드와 함께 소래를 거쳐 북부지방(여행 중 반기독교 칙령으로 소환)

3차 여행: 1888년 10월~11월, 송도~소래~평양~의주~평양~해주~서울로 여행

4차 여행: 1889년 2월, 올링거와 함께 공주까지

5차 여행: 1889년 8월 16일~9월 7일, 존스(Jones)와 지평~양평~원주~충주~문경~상주~진두~선산~대구~밀양~청도~남천~부산

6차 여행: 1898년 3월 9일~26일까지 평양 방문, 1896년 파송된 노블 선교사의 환영받고, 3월 20일 주일날 한국인에게 3번, 외국인에게 1번 설교를 함.

7차 여행: 1898년 10월 3일~10월 7일, 1898년 9월 24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원산에서 서울까지 귀경

Ⅲ. 아펜젤러의 7차례 선교 탐방 일기 세부 내용

1. 1차 선교 탐방 여행(1887년 4월 13일~5월 12일)

평양도성 동문 모습
평양도성 동문 모습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아펜젤러는 메릴 감독(Bishop Merrill)에게 한국 지역 감리사로서 보고한 1887년 연례보고서에서 그의 선교여행 구상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887년 연례보고서 ‘Evangelistic Work’ 단락에 보이는 아래의 글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메릴 감독에게 보낸 편지글을 재인용한 것 같다.

“작년 5월, 저는 자신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한 한국인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진실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보여, 처음에는 번역 일을 좀 맡겼고, 이후에는 매서인으로 고용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이런 일을 제안했을 때 그는 매우 기꺼이 응하며, 몇 년 전 존 로스(John Ross) 목사와 매킨타이어(McIntyre) 목사의 지도하에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분들은 북쪽을 통해 한국에 들어와 좋은 씨앗을 심었으며, 우리는 그 수확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스 목사는 이 나라에서 200마일 떨어진 봉천(선양) 에 살면서도 100명이 넘는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매서인은 언문으로 된 마가복음과 우리 교리문답서를 보급해 왔으며, 두 번이나 폭행을 당하면서도 동포들에게 선을 행하는 특권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매서인 한 명과 함께 이 편지가 발송될 때쯤 시골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한 달에서 6주 동안 떠나 있을 것이고, 후자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압록강 가 의주에 있는 집으로 갈 것입니다. 그는 아마 약 3개월 동안 떠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평안도에 많은 신자가 선교사가 와서 세례를 주고 교회를 조직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줍니다.

이 사람들을 구원하신 분의 이름으로 저는 이제 그들을 은자의 나라에 풀어놓으며, 내년 봄에는 이들을 방문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이들에게 세례 주기를 희망합니다. 이 여행은 이번 가을에 추진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만, 제가 없는 동안 학교를 돌볼 사람이 이곳에 없습니다. 오, 이 유망한 사역지에 더 많은 일꾼이 있기를!”

위의 편지를 보내고 나서 아펜젤러는 헌트와 바로 평양을 방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1887년 연례보고서 말미에 이렇게 첫 선교 탐방 여행을 다녀온 것을 기록했다.

“올해 4월과 5월에 저는 같은 이름의 도인 서북쪽 도의 도읍이자 1,000년 전 한국의 수도였던 평양시를 방문했습니다. 평양은 서울에서 185마일 떨어져 있으며 서울 다음으로 인구가 많습니다. 이 도는 왕국에서 가장 크고 풍요로운 곳으로, 좋은 농경지와 많은 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양쯔강 다음으로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강’인 대동강은 도시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까지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 봉천에서 파견된 매서인들에 의해 이 도에서 개척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원자가 필요하며, 이 유망한 사역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많은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1차 여행은 1887년 4월 13일~5월 12일까지 헌트(J. H. Hunt)와 송도를 거쳐 평양까지 다녀온 첫 선교 탐방 여행으로 모든 여행 기록이 번역본으로 소개되었다. (노종해 번역. 『자유와 빛을 주소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 정동제일교회 『자유와 빛으로』, 정동삼문출판사, 1998.)

그리피스는 그의 책 ‘William E. Griffis, H. G. Appenzeller. A Modern Pioneer in Korea, 1912’에서 1차 북부 여행에 관해 25일간의 일기를 요약해 소개했지만 주관적 해석이 많이 포함되어 사실을 왜곡한 곳이 여러 기술에서 발견된다.

2. 제2차 선교 탐방 여행(1888년 4월 17일~5월 4일)

아펜젤러는 새로 임명된 닌드 감독(Bishop Ninde)에게 한국 지역 감리사로서 보고한 1888년 연례보고서 서두에서 그의 선교 탐방 여행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올해 봄, 나는 장로교 선교회의 H. G.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와 동행하여 한국 북부 지역의 선교 사역을 둘러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우리는 탐방하며 의약품과 성경, 전도지를 판매했다. 사람들은 의약품을 구하는 데 열성적이었으며, 성경과 전도지 판매에 대해서도 반감이나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곳에서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책을 전달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따뜻하고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

이렇게 약 2주간 여행을 이어가던 중, 우리는 서울에 있는 미국 공사로부터 한 편의 전통문을 받았다. 그 전통문에 따르면, 우리가 수도를 떠난 이후 국왕 전하의 명으로 조선 외무독판(외무교섭기구)이 공사관으로 공문을 보내왔다고 한다. 해당 공문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가 잘 알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이는 정부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며 조약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항이므로, 이러한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공사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미국 공사로서 본인의 조력이 요청되었으므로, 귀하께서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치고 그 의식과 성례를 집행하는 행위를 자제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라고 전해왔다.

이러한 제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는 이 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으며, 한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역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신속한 순응과 협조는 한국 정부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2차 선교 탐방 여행은 1888년 4월 17일~5월 4일까지 언더우드와 함께 소래를 거쳐 북부지방을 여행하던 중 미공사로부터 반기독교 칙령으로 소환된 것이다. 아펜젤러가 남긴 2차 선교 여행에 관한 기록은 위에 소개한 1888년 연례보고서 기록이 전부이다. 그러나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의 생애와 사상』을 쓴 다니엘 데이비스는 아펜젤러의 제2차 여행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펜젤러, 호레이스 언더우드, 아펜젤러의 매서인 장 씨는 1888년 4월 17일 서울을 떠나 1,500마일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펜젤러는 이 여행은 우리에게 조선인을 위한 사역에 대하여 더 좋은 생각을 갖게 하였고, 선교 사역을 분담하는 일들을 더욱 잘 고려할 수 있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엇갈린 소식을 받고 떠났다. 먼저는 미국 공사관 대표인 딘스모어(H. A. Dinsmore)가 그들에게 선교 여행의 불법성에 대하여 경고하였으나, 그다음으로 조선 외무아무독판 책임자로부터는 평화로운 여행을 기원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의주에서 아펜젤러는 18명의 남자로 붐비는 8×12피트의 좁은 방에서 설교하였고 그 후 언더우드는 8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평양을 여행하던 중 딘스모어에게서 온 편지가 그들에게 도착하였다. 딘스모어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당신들이 서울을 떠난 이후 조선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조선 사람들에게 전파하는데,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조선 정부가 잘 알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국왕 폐하의 명령으로 조선 외교부로부터 전달받았음을 알립니다. 이 편지는 조선 정부가 선교 여행을 반대하며 조약에 의하여 승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중단시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딘스모어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에게 교리의 가르침과 세례를 중단하여 달라고 요청하면서 곧 선교 금지 칙령이 해제되고, 기독교의 혜택을 이 나라 사람들에게 자유롭고 제한 없이 제공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편지를 마감하였다.

두 선교사는 딘스모어의 요청을 논의한 뒤 평양으로부터 그들에게 전하기를 세례와 가르침, 설교를 삼가면서 여행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데이비스 책 295쪽) 밝히고 그 전갈의 내용들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서울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즉시 돌아오라는 장로교 선교회로부터 전보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그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하고 즉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1888년 5월 4일, 서울에 도착하자 아펜젤러는 그 소동의 근원이 임금이 원치 않는 곳에 교회 건물을 짓고 있는 로마 가톨릭 본부의 결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곳의 가톨릭 신자들은 임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이 일에 대하여 너그럽게도 건축을 위하여 다른 지역을 제공하였으며, 만약 그들이 이사할 경우 현재의 부지에 대하여도 적절하게 보상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왕은 모든 기독교 사역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고 개신교회인 우리까지도 죄인이 되어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1891년 이화학당
1891년 이화학당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시간이 흐르면서, 아펜젤러는 자신의 복음 사역이 1888년 조선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칙령을 자극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1888년 임금의 칙령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가톨릭 신자들에게 돌리는 것으로 바꾸었다. 명백한 것은 서울과 조선 북부에서 그의 복음 사역은 금지령에 기여하였다.

 

배재학당, 이화, 그리고 스크랜턴 박사의 병원이 계속되는 동안 아펜젤러는 베델에서의 예배, 기도회 및 주일학교나 배재학당 학생들에 대한 모든 형태의 복음 사역을 중단하였다. 직접적인 복음 사역의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1888년 4월 칙령을 어기려 하였던 그는 상황이 복음 사역을 재개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었다고 믿을 때까지는 신중하게 조선 정부의 지시를 따르기로 하였다.

아펜젤러는 마침내 조선 정부가 허용하는 복음 선교 사업에 대한 실제적인 한계를 발견하였다. 서울과 조선 전역에서 그의 복음 선교 사역은 조선 당국에 구속되지 않고 명백하게 하며 열성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정부의 침묵을 그의 복음 선교 활동을 허락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나 1888년 4월 기독교 선교에 대한 금지 칙령은 얼음으로 뒤덮인 호수의 두께를 자신했던 사람이 얼음이 깨어지고 얼어붙은 물속으로 추락할 때 충격을 받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펜젤러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1)

아펜젤러 자서전을 쓴 그리피스의 책에는 2차 선교 여행 기록은 없지만, 그와 함께 여행했던 언더우드의 부인은 그가 집필한 『언더우드, Underwood of Korea by Lillias H. Underwood』 책에서 아펜젤러와 함께한 언더우드의 평양 여행을 이렇게 소개했다.

“언더우드의 두 번째 여행은 내가 도착한 직후인 1888년 봄에 내륙과 북쪽을 향해 이뤄졌다. 그는 4월에 아펜젤러와 함께 출발했는데,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조사(助師)들이 한 작업과 뿌린 씨의 열매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는 고무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돌아와야만 했다. 그들은 평양에서 일을 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강한 관심을 일깨운 나머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을 스물다섯 명이나 만들어 놓았는데, 갑자기 선교부와 미국 공사가 서울로 그들을 소환했던 것이다. [이유는 이러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대궐과 그 근처에 있는 종묘를 굽어볼 수 있는 그런 높은 지대에 자신들의 성당을 지을 자리를 물색해 놓고, 한국인으로부터 은밀히 그 땅을 매입해 들였다. 그리고 프랑스 대표부와 예수회 지도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항의와 탄원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국 고위층이 격노했고, 결국 한국에서 기독교의 설교와 교육을 금지하는 칙령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한국에 있던 젊은 선교사들에게도 귀환 명령이 떨어지고, 학교 및 기타 작은 집회소에서 행해지는 모든 형태의 종교의식도 곧 중지되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본래 이 칙령이 로마 가톨릭교도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의 복음 사업에까지 지장이 있게 되었다고 이 소환 명령에 몹시 불쾌해했다.”2)

위 자료에서 데이비스가 기술한, “의주에서 아펜젤러는 18명의 남자로 붐비는 8×12피트의 좁은 방에서 설교하였고 그 후 언더우드는 8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자료의 혼선’ 및 ‘오류의 대물림’으로 잘못 인용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2차 선교여행 때 의주를 간 적이 없고 평양에서 딘스모아 공사의 칙령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계속>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미주]

1) 다니엘 데이비스(김낙환, 김영훈 편역),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의 생애와 사상, 배재대학교 출판부, 294-297.
2) Lillias H. Underwood, 이만열 역, 언더우드·Underwood of Korea,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79-81.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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