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감사
성경
누가복음 17장 11-19절
중심 말씀
누가복음 17장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서론
당연함의 시대, 사라진 감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어 깨우는 한 가지 영적 주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우리는 흔히 삶의 조건이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건강이 무너졌을 때는 “하나님, 제 건강만 회복시켜 주시면 평생 감사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울 때는 “이 고통의 터널만 지나가고 물질의 문제가 해결되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꽉 막힌 문제가 해결되고, 간절히 구했던 기도가 응답을 받고, 내 손에 원하는 결과가 쥐어지면 감사는 저절로 넘쳐날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7장의 말씀은 우리의 이러한 통념을 완전히 깨뜨려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의 가장 비참한 절망 속에서 동일한 은혜, 동일한 기적을 경험한 열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고칠 수 없는 절망적인 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열 사람이 똑같이 부르짖었고, 열 사람이 똑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었으며, 열 사람이 똑같이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온몸이 새살로 돋아나는 전율할 만한 은혜를 입은 후, 주님께 다시 돌아와 무릎을 꿇고 감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과 탄식이 섞인 목소리로 물으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7)
이 주님의 질문은 단순한 인원 점검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인간의 본성과 영적 실상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무거운 질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진리를 선포합니다. 감사는 결코 ‘무엇을 얼마나 받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똑같은 은혜를 입고도 그것을 잊어버린 채 자기 길로 가버리는 아홉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받은 은혜를 온 마음으로 깨닫고 주님 발 앞에 돌아와 엎드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참된 변화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으로 증명됩니까? 그것은 방언이나 대단한 능력이 아닙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온 삶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감사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깊이 상고해 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1. 감사는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나병은 단순한 육체의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나병은 ‘하나님의 형벌’로 여겨졌던 병이었으며, 공동체 전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절망의 병이었습니다. 레위기 율법에 따라 나병환자는 사랑하는 가족의 품을 떠나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마을 밖 헐벗은 곳에서 거하며, 누군가 가까이 오면 스스로 입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관계의 끊어짐, 사회적 매장, 육체의 고통과 영적 수치심 속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격리 율법 때문에 차마 주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눅 17:12-13) 하며 절규하듯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며 단 한 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눅 17:14). 아직 몸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로 걸어가는 그 순종의 길 위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피부가 살아나고, 문드러졌던 손가락과 발가락이 회복되며, 평생을 괴롭히던 병마가 떠나갔습니다. 열 명 모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순간, 한 사람의 행동이 아홉 사람과 갈라집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5) 이 한 사람은 왜 제사장에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 자신이 어떤 절망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어떤 존재였는지,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었다면 어떠했을지를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감사가 사라지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아습니까?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03편 2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억하라, 잊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은혜를 잊어버리는 데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위기 속에서는 밤을 새워 기도합니다. “주님,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시면,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내 평생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눈물로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님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감사는 없는 것을 바라보고 불평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삶에 쏟아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세어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영혼은 주께서 베푸신 그 구원의 은혜, 지나온 삶의 고비마다 도우셨던 그 손길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2.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할 때 감사는 사라집니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고침을 받고 기뻐서 제사장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이제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는 설렘에 마음이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이 율법의 명령이니 당연한 거지.’ ‘어쩌면 내 병이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것일지도 몰라.’ 은혜가 당연함으로 바뀌는 순간, 감사는 그 즉시 사라집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의 요소들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이 과연 하나라도 있습니까? 아침에 눈을 떠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것, 내 두 발로 자유롭게 땅을 밟고 걸어 다니는 것, 사랑하는 가족과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는 것, 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기도해 줄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매일 반복되다 보니, 우리는 이것을 나의 권리이자 ‘당연한 일상’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갈망하던 기적이며, 오직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와 보살핌이 있기에 가능한 선물입니다.
감사의 가장 무서운 적은 단순한 불평이 아닙니다. 바로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부모가 나에게 해주는 수고를 당연하게 생각하면 자녀의 입에서 감사가 사라집니다. 배우자가 가정과 일터에서 쏟는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면 부부간의 존중과 감사가 사라집니다. 교회에서 누군가가 묵묵히 섬기는 봉사를 당연하게 생각하면 은혜의 공동체가 비판과 평가의 장으로 변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요를 누리게 될 때를 내다보시며 신명기 6장 10-12절에서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먹어 배부를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고난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은, 배부르고 평안할 때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익숙해진 일상이라고 해서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익숙함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크고 지속적인 은혜의 증거입니다. 당연함의 불신앙을 깨뜨리고 일상의 은혜를 다시 발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참된 감사는 행동으로 돌아와 표현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에서 주님께 돌아온 한 사람의 모습을 다시 유심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돌아와”라는 동사입니다. 아홉 명도 마음속으로는 ‘아, 참 고맙다. 선생님 덕분에 살았네’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는 생각에 머물렀고, 자기들의 길을 가버렸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주님께로 다시 걸음을 돌려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마음속 감정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반드시 돌아오는 행동이며,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도움을 받았다면 도와준 이에게 찾아가 감사를 전하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마음을 담아 전화 한 통을 걸고, 따뜻한 문자 한 줄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곁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없이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표현되지 않은 감사는 감사가 아닙니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고마워한들, 그것을 입술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알 수 없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보십시오. 바울은 옥중에서도, 사역의 바쁜 여정 속에서도 성도들과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감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4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감사가 표현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무너지고 관계가 살아납니다. 감사가 입술로 선포될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돌아와 엎드려 표현하는 삶이 진짜 변화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4. 감사는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본문 16절은 돌아온 사람의 모습을 더욱 상세히 묘사합니다.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흙먼지가 날리는 길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주님의 발등상 아래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왜 감사와 겸손은 언제나 함께 나타나는 것일까요?
감사의 고백 속에는 영적인 핵심 진리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것은 내 힘이나 내 자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에는 자기중심성과 교만이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결과다.’ ‘내가 고생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히 누려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경건하고 열심히 살았으니 복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코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압니다. 내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지 않았다면, 기회를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음을 압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준 부모와 성도들의 헌신이 있었음을 압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자신의 모든 사역과 삶을 이렇게 단 한 줄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 은혜의 의식이 있는 사람은 결코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렸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신을 빚진 자로 깨닫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높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5. 감사는 영적인 시선이며, 작은 것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16절 후반절에는 놀라운 반전의 문장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받고 개처럼 여겨지던 부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이라 자부하던 나머지 아홉 명은 당연히 자신들이 구원받고 고침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 사회에서 이중으로 소외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은혜를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작은 은혜 하나에도 온 마음으로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한 가지’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아홉 가지’의 풍성함을 보지 못합니다. 늘 남과 비교하며 부족한 것, 없는 것, 실패한 것만을 돋보기로 확대해서 바라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상황이 여전히 어렵고 결핍이 존재할지라도, 그 가운데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남은 은혜’를 바라봅니다.
성경 속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 6장에 보면 다니엘을 시기한 왕의 신하들이 하루라도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악법을 만들었습니다.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다니엘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뒷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다니엘은 문제가 다 해결되어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사자 굴의 위협이 사라져서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목숨이 태산 같은 위기 속에서도 그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감사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지만, 평소에 불평하고 원망했던 사람 역시 동일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영적 습관의 결과입니다.
감사는 현실을 무책임하게 부정하는 낭만주의가 아닙니다. 너무 힘든데 억지로 참으며 불행하지 않은 척하는 위선이 아닙니다. 감사는 눈물 나는 고난의 현장 한가운데서도 여전히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발견하는 거룩한 영적 시선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조건이 완벽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어 있는 외양간 앞에서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 이것이 환경을 뛰어넘는 믿음의 감사입니다.
6. 감사는 나를 바꾸고, 공동체를 살려냅니다
우리가 감사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가정 안에서 불평과 지적의 말 대신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늘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배우자의 작은 수고에 “오늘도 애써줘서 고마워요”, 자녀에게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고맙다”, 부모님께 “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표현하기 시작하면 가정의 영적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무엇을 해도 당연하게 여기고 비판만 가득한 곳에는 지침과 낙심만이 남습니다. “왜 이것밖에 못 했어?”, “원래 당신이 해야 할 일이잖아.” 이런 말들은 사람의 마음을 닫히게 만들고 관계를 병들게 합니다. 잠언 15장 15절은 말씀합니다.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감사는 환경이 바뀌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하기 시작할 때 내가 환경을 바라보는 영적 안경이 바뀌고, 내 마음이 바뀌며, 마침내 내가 속한 가정과 일터와 교회가 은혜의 잔칫집으로 변화됩니다. 감사는 나를 살릴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거룩한 영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7.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말씀의 가장 깊은 하이라이트는 17절에 나오는 주님의 안타까운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아홉 명이 어느 동네, 어느 집에 갔는지 몰라서 이 질문을 던지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이 질문은 “은혜는 받아 누렸으면서, 나에게 드려야 할 감사는 어디로 가버렸느냐?”라는 탄식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은 주님의 백성인 우리를 향해 똑같이 물으실 수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건강과 생명을 주었는데, 너의 감사는 어디 있느냐?” “내가 너에게 사랑하는 가족과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주었는데, 너의 감사는 어디 있느냐?” “내가 기도의 고비마다 응답해 주고 고난에서 건져내 주었는데, 너의 감사는 어디 있느냐?” “무엇보다 독생자 예수의 피로 너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었는데, 너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과 감사는 어디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기도에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주님, 이것이 부족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저것을 더 채워 주십시오.” 그러나 이미 주신 은혜를 하나하나 세어보며 눈물로 드리는 감사의 기도는 얼마나 자주 드리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7절에서 우리가 성숙한 믿음에 서는 비결을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믿음이 깊어질수록 불평의 소리는 줄어들고 감사의 고백은 넘쳐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은혜를 누리고도 자기 길로 가버리는 ‘아홉 명’의 자리에 머물지 마십시오. 은혜를 깨닫고 주님 발 앞에 돌아오는 ‘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감사의 삶
오늘 본문의 마지막 19절에서 예수님은 돌아와 엎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참으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9) 이 구절의 깊은 의미를 보십시오. 아홉 명의 나병환자는 육신의 고침을 받는 데서 끝났습니다. 그들은 병은 나았을지 몰라도 영혼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함으로 돌아온 단 한 사람은 육신의 깨끗함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는 은혜의 관류를 경험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매너나 도덕적 덕목이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를 기적의 자리에서 더 나아가 ‘구원과 은혜의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인도하는 거룩한 다리입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없는 것과 부족한 것만을 바라보며 불평했던 우리의 완악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감사가 아니라, 걸음을 돌려 주님 발 아래 엎드렸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입술과 삶으로 감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가정과 공동체 속에 불평은 떠나가고 감사의 고백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은혜를 잊고 제 길로 가버린 아홉 명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기억하여 주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는 그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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