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제목
예수 믿고 변화된 삶

 

성경
로마서 12장 1–8절

중심 말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수 18:3)

서론

예수 믿고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교회에 다니게 된 것입니까? 주일에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게 된 것입니까? 물론 이것도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돈과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교회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합니다. 심지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달라져야 합니다.

본론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종교 하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은 바로 그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12장은 매우 중요한 한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왜 “그러므로”입니까?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9).

이 모든 복음을 설명한 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십시오.”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변화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변화된 삶은 어떤 삶입니까?

1. 첫째,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명령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용서하신 자비입니다. 의롭다 하신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자비입니다. 성령을 주신 자비입니다. 넘어질 때 붙들어 주신 자비입니다.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자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드릴 테니 저것을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헌신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헌신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고백이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는데 제가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왜 몸입니까? 우리는 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하고, 발로 움직이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사람을 만나고 섬깁니다. 그러므로 몸을 드린다는 것은 육체만 드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내 시간도, 내 물질도, 내 재능도, 내 가정도, 내 직장도, 내 관계도, 내 계획도 주님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먼저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레위기 1장 3절은 번제를 드릴 때 “흠 없는 수컷”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무거나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병들고 상하고 쓸모없는 것을 처리하듯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가져오자 하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말 1:8)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제물의 가격 때문이 아닙니다. 그 제물에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준비된 제물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제물을 제단에 올렸습니다. 일단 하나님께 드린 것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닙니다. 드린다는 것은 소유권을 하나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소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양이나 염소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희 몸을 드리라.” 쉽게 말하면, “이제 네가 제물이 되어라.”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단번에 완전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또 다른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나를 위해 드리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내가 감사의 응답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제물”입니다. 구약의 제물은 죽여서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살아 있는 채로 자신의 삶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구약에서 제물을 살폈듯이 나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내 안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없는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예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보다 더 붙잡고 있는 것은 없는가?”

시편 139편 23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물론 내가 완벽해진 다음 하나님께 나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죄를 숨긴 채 나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 시작종이 울릴 때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대표기도를 위해, 특송을 위해, 찬양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준비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축복하시는 겁니다. 또한 말씀을 받을 마음을 준비하고, 기도로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께 집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배에는 참석보다 준비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제단에 올렸듯이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몸은 와 있지만 내 고집과 욕심은 그대로 붙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진짜 예배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이것이 산 제물의 모습입니다. 삶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뒤에도 산 제물로 살아야 합니다. 주일에 “주님, 저를 드립니다”라고 찬송했다면 월요일에는 그 고백대로 살아야 합니다. 입술을 드렸다면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손을 드렸다면 섬김이 달라져야 합니다. 발을 드렸다면 가는 곳이 달라져야 합니다. 눈을 드렸다면 보는 것이 달라져야 합니다. 시간을 드렸다면 우선순위가 달라져야 합니다. 물질을 드렸다면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준비했다면, 오늘 우리는 예배자인 나 자신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시작되지만 삶에서 증명됩니다.

2. 둘째,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은 생각이 달라집니다

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여기서 “이 세대”는 단순히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가치체계와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더 가져야 행복하다.” “더 높아져야 성공한다.” “남보다 앞서야 가치가 있다.” “당하면 갚아야 한다.” “내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자유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낮아지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받으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주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갚으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은 세상적 가치관에서 성경적 가치관으로 삶의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적 가치관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이 옳다고 하니까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다고 느끼니까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고 나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묻고 그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얼마나 가졌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성경은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묻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높아졌느냐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지만 성경은 얼마나 충성했느냐를 묻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성경은 하나님께 인정받는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성경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원수를 이겨야 승리라고 하지만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승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행 20:35).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성공이 필요 없어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더 이상 내 인생의 최종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성공보다 충성을, 경쟁보다 섬김을, 보복보다 용서를,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세상적 가치관에서 성경적 가치관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세상을 떠나라고 하지 않고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직장 생활도 하고, 사업도 하고, 공부도 하고, 경쟁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 산다고 해서 세상의 가치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변화는 먼저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이 바뀌면 보는 것이 달라지고, 보는 것이 달라지면 선택이 달라지고, 선택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며, 행동이 달라지면 결국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먼저 물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묻습니다. 전에는 “나에게 유리한가?”를 물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를 묻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보실까?”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2절 마지막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결국 마음이 새로워지는 목적은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변화된 사람은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내 생각과 선택과 삶을 그 뜻에 맞추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변화된 삶은 결국 기준의 변화입니다.

“내가 원하는가?”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로, “나에게 유리한가?”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로,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는가?”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로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받는 변화입니다.

3. 셋째,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은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3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변화된 사람은 먼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 “내 생각이 항상 옳다.” “내 은사가 더 중요하다.” 이렇게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쓸모없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성경적인 겸손은 아닙니다. 겸손은 나를 형편없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만큼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4–5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몸에 비유합니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는 관객석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는 구경꾼이 아니라 지체입니다. 구경꾼은 마음에 들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판하지만, 지체는 몸의 필요와 아픔에 반응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가장 먼저 예배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예배 시간에 겨우 맞춰 들어와 예배가 끝나면 바로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일찍 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로 마음을 정돈하고, 말씀 받을 준비를 하고, 맡은 일이 있으면 미리 점검합니다. 처음 온 사람이 있으면 먼저 인사하고, 혼자 있는 성도가 있으면 다가갑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오늘 설교가 좋았다, 안 좋았다”를 평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내가 순종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관객은 예배를 평가하지만, 지체는 예배를 준비하고 참여하며 말씀에 순종합니다. 또한 교회에 오는 목적도 달라집니다.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는가?”, “나를 알아주는가?”, “내 마음에 드는가?” 이것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묻습니다. “오늘 내가 누구를 섬길 수 있을까?” 기도가 필요한 성도를 살피고, 새로 온 성도에게 먼저 다가가며, 교회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받으러 오던 사람이 주러 오기 시작하는 것, 이것이 변화입니다.

성도들을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집니다. 교회에는 성격도, 나이도, 생각도, 신앙의 연륜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서로 지체”라고 말합니다. 내가 선택해서 한 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한 몸으로 묶으셨습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을 품고, 부족한 사람을 기다려주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도하고, 낙심한 사람이 있으면 격려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 교회는 서로의 짐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맡겨진 일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집니다. 6절부터 바울은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의 여러 은사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은사가 더 크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입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안내하고,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새가족을 돌보고, 아픈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일도 모두 귀한 섬김입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은사는 명예가 아니라 책임입니다. 직책은 대접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직분이 높아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책임이 커져야 합니다. 변화된 사람에게 교회의 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닙니다. “누가 하겠지.” “담당자가 하겠지.”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내가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면 교회를 대하는 모습에서도 변화가 보여야 합니다. 예배에 겨우 맞춰 오는 사람에서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예배를 보고 가는 사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으로, 받으러 오는 사람에서 섬기러 오는 사람으로, 누가 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에서 내가 먼저 움직이는 사람으로, 직분으로 대접받으려는 사람에서 직분으로 책임지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이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습니다. 대신 묻습니다. “주님, 이 교회를 위해 제게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때 우리는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서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결론

예수 믿고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예수 믿고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로마서 12장은 그 답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믿고 예배가 달라집니다.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예수 믿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생활이 달라집니다. 관객이 아니라 지체가 되어 섬깁니다. 예수 믿고 관계가 달라집니다. 먼저 존중하고 함께 웃고 함께 웁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상처받았을 때의 반응까지 달라집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로마서 12장은 “너희 몸을 드리라”로 시작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 끝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이라면 삶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내 몸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월요일에는 그 몸으로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주일에 내 입술로 찬송했다면 월요일에는 그 입술로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주일에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면 월요일에는 그 손으로 누군가를 섬겨야 합니다. 주일에 “주님, 저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고백했다면 이제 내 삶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준비한다는 것은 옷을 준비하고 헌금을 준비하고 찬송을 준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예배자인 나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드린다는 것은 예배당에 왔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말과 시간과 물질과 관계와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드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죄인을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응답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으니 이제 나도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방향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세상을 닮아가던 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갑니다. 대접받으려던 사람이 섬기기 시작합니다. 상처를 되갚던 사람이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던 사람이 선으로 악을 이기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다시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주님, 내 몸을 드립니다. 내 생각을 드립니다. 내 시간을 드립니다, 내 물질을 드립니다. 내 관계를 드립니다. 내 계획을 드립니다. 내 남은 생애를 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주일예배가 월요일의 삶으로 이어지고, 우리의 고백이 행동으로 나타나며,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예수 믿고 변화된 삶입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의 가치와 내 생각을 따라 살았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몸과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게 하시고, 교회를 사랑하며 서로 섬기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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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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