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시민단체 간담회에서 낙태 약물 허용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시민사회와 의료계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국회의 후속 입법이 없는 상태에서 행정부가 나서 허용할 경우 초래될 헌법 질서 훼손과 의료현장 혼란을 우려하며 공개 반대에 나섰다.

보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시민단체 간담회에서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과 관련해 “미프진은 보건복지부와 여성계가 얘기하고 있다. 2년은 (병원) 원내 처방, 원내 조제 하고 2년 뒤에는 병원 처방, 원외 약국 조제로 가닥을 잡았다”고 말했다. 임신 중지약 도입 뒤 관리 체계 내용을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낙태 약물 허용을 공식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시민사회가 즉각 반발했다. 태아·여성보호국민연합은 7일 발표한 성명에서 “낙태의 허용 주수·사유·절차와 국민의 생명·건강에 직결되는 기본적인 안전관리 및 사후관리체계는 국회의 입법을 통해 먼저 명확하게 규율되어야 한다”며 “국회의 법령 정비에 앞서 낙태 약물을 허가하는 것은 국회의 입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식약처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법제처의 법령해석에 근거해 국회의 입법 없이 낙태약물 허가를 강행한다면 품목허가처분에 대한 취소소송 및 집행정지 신청을 포함한 모든 행정·사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의료계도 입법 없는 행정적 허용에 따른 근본 문제를 제기했다. 헌재가 낙태죄를 즉시 폐지하지 않고 입법 시한을 부여한 건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사이의 기준을 국회가 법으로 정하라는 뜻인데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행정부가 행정 조치만으로 약물 낙태를 허용하는 건 헌재 결정 취지에 반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 대통령이 간담회 자리에서 임신중지 약물 도입과 관련해 언급한 건 약물의 처방에 있어 병원과 약국 사이에서 조정해야 할 사안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처방의 방법이 아니라 임신 몇 주까지 허용할지, 사회·경제적 사유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상담과 숙려기간을 둘지 등을 결정하는 일이다. 이런 중요한 사항들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무슨 처방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의료계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입법 영역에 속한 문제를 정부가 무조건 행정으로 밀어붙이면 결국 모든 책임이 의료현장에 떠넘겨지게 될 거란 데 있다.

행정부 주도로 낙태 약물이 허용되면 현행 법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약사법에는 의약품에 임신중지를 암시하는 표시를 금지하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을 그대로 둔 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임신중지 약물을 허가할 경우 관련 공무원이 직무유기나 직권남용으로 처벌받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허가 절차와 안전성 검증 또한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 해외에서 유통되고 있는 미프진은 임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의 작용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약은 감기약처럼 단순히 복용하면 끝나는 일반 의약품이 아니다. 복용 전에 반드시 임신 주수를 확인하고, 산모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게 필수다. 복용 후에도 출혈, 불완전 유산, 감염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의료진의 관찰과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처럼 의료진의 책임과 기준이 필수적으로 동반돼야 하는데 의사가 무슨 기준으로 처방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등에 대해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이런 논란에 미프진 국내 허가에 찬성하는 측은 해외에서 안정성이 이미 입증된 약물이란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국내 의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해외에서 검증됐더라도 한국인의 약물 대사 특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만큼 외국 임상자료만으로 허가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는 거다.

의료계가 임신중지 약물의 안전성을 뒷받침하는 해외 통계 자료 자체에 불신하는 이유는 이 통계가 실제 위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장지영 이화여대 서울병원 교수는 이런 논란과 관련해 미국 윤리정책센터(EPPC)가 2017~2023년 약 86만 건의 보험청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약물을 사용해 임신을 중지한 여성의 10.9%가 중대한 부작용을 경험한 수치를 근거로 제시했다. 의료계는 이 수치가 미국 FDA와 제조사가 제시한 0.5% 미만보다 약 22배나 높다는 점을 들어 약물을 한국에 들여오기 전에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가교임상시험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식약처가 임신 중지약 허가에 여태껏 신중론을 유지해온 것도 실은 이런 논란이 뒷받침됐다고 볼 수 있다. 미프진 자체의 안전성·유효성 심사뿐 아니라 어느 임신 주수까지 사용할지, 어떤 의료기관과 의료인이 처방할 수 있도록 할지, 복용 후 출혈이나 불완전 유산 등 이상 반응 발생 시 어떻게 의료기관과 연계할지 등 안전관리 기준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해외 직구로 인한 낙태 약물의 오남용 사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모든 이슈의 열쇠가 식약처의 최종 허가에 집중되고, 결국 시장이 열리기도 전에 물건부터 팔리는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 거다. 낙태 약물 오남용 사고를 막으려면 국회의 입법 절차를 거쳐 안전기준부터 마련해야 하는 데 그 전에 덜컥 허가부터 하고 나서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 건가.

국민의 생명이 걸린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한쪽의 말만 듣는 것을 소통이라 할 수 없다. 종교계와 시민사회, 의료계가 반대한다고 아예 귀를 닫는 건 이 대통령이 평소에 강조해온 통합 정신과도 결이 다르다. 정말 국민 건강이 걱정돼서 서두르는 거라면 이제라도 국회에 조속한 입법을 요청하고, 안전성 검증을 지시하는 게 순서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