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스티븐 제임스의 기고글인 '영적 선택지들: 왜 그리스도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닌가'(The spiritual menu: Why Christ isn't a choice)를 8월 2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티븐 제임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세븐스프링스에 위치한 세븐스프링스침례교회(Seven Springs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리버티대학교 롤링스 신학대학원(Rawlings School of Divinity)에서 응용 변증학(Applied Apologetics)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의 글은 성경적 변증학과 기독교 세계관, 해석학, 하나님의 계시와 현대 사회가 기독교 신앙에 제기하는 도전 사이의 관계를 주로 다룬다. 목회자이자 변증학 연구자로서 그는 오늘날 문화 속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질문과 경쟁하는 진리 주장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있는 성경적·신학적 논의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힘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불교에서 마음챙김을, 스토아철학에서 미덕을, 기독교에서 의미를, 심리학에서 정체성을, 개인적 경험에서 도덕성을, 그리고 실험실에서 과학이 입증한 사실들을 가져와 보라. 어느 하나의 전통도 주도권을 쥐게 하지 말고, 각 영역에서 가장 좋은 조각들을 골라 하나의 세계관으로 조립하라. 이런 접근에서 진정한 지혜는 어느 한 전통에 자신을 맡기는 데서가 아니라, 여러 전통의 장점을 취합하는 데서 나온다.
누구도 이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어느 정도 이런 방식의 세계관에 익숙해져 있다. 개방적이고 겸손하게 들리며,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학문과 사상에서도 우리는 참된 통찰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경쟁하는 종교와 철학 체계의 통찰을 뒤섞어 진리를 판단하는 하나의 새로운 틀을 만들기 시작하면, 단순한 ‘개방성’을 넘어선 문제가 발생한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신념들을 섞어 새로운 종교적 체계를 만드는 것을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불러왔다. 여러 전통 가운데 옳다고 판단되는 요소를 선택적으로 취하는 방식은 ‘절충주의(eclecticism)’라고 할 수 있다. 절충적인 접근 자체가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까지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편입시키는 순간 시작된다. 그때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는 방식이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이 오래도록 경계해 온 문제를 만들어낸다.
그 배후에는 하나의 거대한 전제가 숨어 있다. 어떤 단일한 신적 계시도 전체를 아우르는 최종 권위를 가질 수 없으며, 궁극적인 진리는 서로 경쟁하는 체계들 속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조립함으로써 완성된다는 가정이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우리는 평생 여러 사상과 종교를 돌아다니며 진리의 조각을 수집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충만함’이 애초부터 흩어져 있지 않았다면 어떨까.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이 방식 속에 숨겨진 또 하나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령 진리가 여러 전통에 부분적으로 흩어져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어떤 조각을 받아들이고 어떤 조각을 버릴지는 결국 누군가가 결정해야 한다.
누가 진짜로 결정하고 있는가
“여기저기서 좋은 것만 가져오자”는 접근이 좀처럼 답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 ‘좋은 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방식의 매력은 어느 하나의 전통에도 최종적인 특권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불교의 어떤 통찰을 받아들일지, 심리학의 어떤 이론을 취할지, 기독교의 어떤 교리는 유지하고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 결정자는 각각의 전통이 아니다. 그것들을 조합하고 있는 개인이다.
개인이 판단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그 개인의 판단을 넘어 그것을 교정하고 심판할 수 있는 최종 권위를 아무것에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떤 하나의 권위도 특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만든 체계가 역설적으로 또 다른 절대 권위를 세운다. 바로 ‘자율적인 자아(autonomous self)’다. 결국 개인은 자신이 참고하는 모든 지혜의 원천, 심지어 그리스도까지도 내려다보며 판단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모든 전통을 향한 겸손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단 한 명의 심판자에게 최종 권한을 넘기는 구조가 된다. 그리고 그 심판자는 바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자기 자신이다.
골로새서는 이 문제에 두 방향으로 답한다. 먼저 진리가 궁극적으로 흩어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지도 분명하게 밝힌다.
조각이 아니라 ‘충만함’ 그 자체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르침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사람의 전통과 음식 규례, 금욕주의, 천사 숭배, 신비한 환상에 대한 집착 등이 그것이었다(골 2:8, 16, 18, 20-23). 오늘날 재료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유혹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를 그분 밖의 어떤 것으로 보완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놀랍다. 그는 경쟁하는 주장 하나하나를 먼저 논박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지점, 곧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바울은 그리스도를 거대한 진리의 퍼즐 가운데 중요한 조각 하나를 제공한 현명한 교사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적이 되시는 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다른 철학자나 종교적 전통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에서 애초에 범주 자체가 맞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이성과 경험, 철학과 과학 역시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세계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몇 구절 뒤 이를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라고 선언한다. 여기에는 다른 전통에서 가져온 조각으로 채워야 할 ‘부분적인 충만함’이 없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모든 충만함이다. 그리스도가 정말 그런 분이라면, 세상의 다른 사상 체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고 성취하신 것을 완성시켜주는 동등한 궁극적 권위로 기능할 수는 없다.
지혜의 이름 아래 숨어 있는 경고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론을 곧바로 강한 경고와 연결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이 말씀은 생각하거나 공부하기를 멈추라는 명령이 아니다. 성경은 신자에게 이성의 스위치를 끄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위험한 철학의 성격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고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사상과 학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는 그것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를 평가하는 독립적인 최종 권위로 자리 잡을 때 발생한다.
바울의 논리 전개를 따라가 보면 더욱 선명하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선언한다(골 2:2-3). 이것이 보화다. 이어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경고한다(골 2:4). 이것이 위협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따라”(골 2:8)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외부 기준에 의해 평가받는 여러 재료 중 하나가 아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따라서 처음에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여기서 나온다.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고 버릴지 결정하는 최종 권위는 자신의 취향과 판단에 따라 사상을 편집하는 자아가 아니다. 그 권위는 그리스도께 있으며, 자아를 포함한 모든 것은 그분 앞에서 평가받는다.
이것이 의미하지 않는 것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과학과 철학, 심리학, 사회학을 비롯해 다른 학문 분야에서 발견되는 참된 관찰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학자와 사상가에게서도 얼마든지 배우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의사는 인간의 몸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고, 심리학자는 인간 행동에 관한 유익한 관찰을 제공할 수 있으며, 철학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러한 지식을 무시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을 어떻게 위치시키느냐이다. 다른 분야에서 발견된 진실한 통찰이 마치 ‘불완전한 그리스도’를 완성하는 조각인 것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모든 주장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앞에 가져와 평가받아야 한다. 주객이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즉, 다른 학문으로부터 배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리스도를 따라” 분별하라는 것이다.
아직 조립 중인 것이 아니라 이미 ‘충만하다’
바울은 결국 자신의 논증이 시작된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9-10).
다른 전통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부분적인 충만함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충만함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며, 지적인 교만을 정당화하는 면허도 아니다. 바울 자신이 믿는 자들에게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골 2:6-7)고 권면한다. 신앙은 계속 배우고 성장하며 깊어지는 삶이다.
그러나 그 성장은 그리스도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다른 곳에서 찾아 채워 넣는 과정은 아니다. 신성의 충만함이 경쟁하는 종교와 사상 속에 흩어져 있고 우리가 그것을 찾아 조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의 주장대로라면 그 충만함은 육체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따라서 진짜 질문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가”가 아니다. 물론 배울 수 있다. 다양한 출처에서 유익한 통찰을 취한다는 의미의 절충주의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여러 영적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혼합주의다. 그리스도를 다른 요소들과 함께 섞어놓고, 그분에게 부족한 답을 다른 체계에서 보충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순간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주장은 무너진다.
결국 모든 접근은 하나의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무엇이 진리인지 최종적으로 누가 결정하는가. 우리는 다른 곳에서 배운 것을 그리스도 앞으로 가져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자신의 판단대 위에 올려놓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 승인하고 나머지는 버리고 있는가.
아무리 ‘개방적인’ 세계관이라 해도 결국 선택하는 사람은 필요하다. 골로새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묻는다. 그 최종적인 심판의 권위가 정말 우리 자신에게 있는가, 아니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된 바로 그리스도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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