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배런 작가
브루스 배런 작가. ©gazette.com/author/bruce-barron/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브루스 배런의 기고글인 '통치 신학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오만을 드러낸다'(Dominion theology reveals hubris unbefitting followers of Jesus)을 8월 2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브루스 배런은 은사주의 운동, 지배신학(Dominion Theology), 미국의 정치 캠페인과 공공정책 등을 연구하며 다양한 경력을 쌓아왔다. 그는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에서 커뮤니케이션 보조 역할로 자원봉사했으며,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세계복음주의연맹 신학 저널의 편집총괄을 맡았다. 또한 현재는 기독교학자협회(Society of Christian Scholars)의 편집 서비스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치통이 심해 치과 치료가 필요할 때, 치료에 동의하기 전에 치과의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부터 묻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주방 싱크대에서 물이 샐 때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기독교인 배관공이 와서 고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대부분이 가장 먼저 바라는 것은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을 찾는 것이다. 물론 치과의사나 배관공이 정직하고, 부당한 비용을 요구하지 않으며, 책임감 있게 일하기를 바랄 수는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기독교인보다 충치를 더 잘 치료하거나 새는 파이프를 더 능숙하게 고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반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 추모예배를 준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전할 기독교 목회자를 찾을 것이다. 영적인 위로와 영생에 대한 기독교적 소망을 설명하는 일은 목회자의 신앙과 소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 정부와 정치는 치과 진료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목회 사역에 더 가까운가. 공직을 맡은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중요한 문제일까.

기독교인이 맡기만 하면 더 잘 돌아갈까

이른바 통치 신학(dominion theology)과 ‘일곱 산 명령(Seven Mountains mandate)’을 강조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와 가정, 정부, 교육, 언론, 예술·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등 사회의 주요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부름받았다고 주장한다.

‘일곱 산’ 개념에는 여러 논쟁적인 지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이 운영하면 사회 각 영역이 자연스럽게 더 잘 돌아갈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다.

사회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직성과 도덕성, 성실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얻은 전문적인 기술과 역량도 중요하다. 공직자든 교사든 기업 경영자든 방송인이든,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그 분야에 필요한 훈련과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이 점에서 충분히 훈련받은 비기독교인이, 자신에게 특별한 영적 소명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전문적인 준비가 부족한 기독교인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인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정치가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유명한 말로 이를 표현했다. “우리 인간 존재의 전체 영역 가운데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시는 곳은 단 1제곱인치도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공적 영역에 단순한 도덕성이나 봉사 정신을 넘어 독특한 사상과 통찰을 제공할 수도 있다. 닉슨 행정부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됐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이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도소선교회(Prison Fellowship)를 설립했다. 그는 형사사법제도에서 범죄자가 피해를 회복하도록 책임지는 ‘배상(restitution)’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강조했으며, 그 아이디어가 출애굽기 22장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카이퍼나 콜슨이 꿈꿨던 것은 기독교인이 사회를 장악하고 다른 이들을 밀어내는 식의 ‘지배(dominion)’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카이퍼는 ‘원리적 다원주의(principled pluralism)’를 강조하며 서로 다른 신앙과 세계관을 가진 공동체가 공적 영역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퍼의 핵심은 기독교인이 권력을 차지해야 한다는 데 있지 않았다.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면서도 탁월한 역량을 갖추고 공공선에 봉사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기독교인은 전문성과 역량을 충분히 갖추는 일보다 ‘영향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문제는 전문적인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종교적 명분만 앞세울 때 결과가 기대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아이다호주 모스코(Moscow)에서 논쟁적인 목회자 더그 윌슨(Doug Wilson)과 연관된 정치 후보들이 선거에서 반복적으로 고전한 사례 역시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독특하고 가치 있는 영적·실천적 지혜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분야에서 신앙을 근거로 전문가처럼 행동한다면, 오히려 그 귀한 지혜의 신뢰성을 스스로 훼손할 수 있다.

신앙은 중요하지만 전문성을 대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공직자의 신앙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필자가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기독교 정치사상가 가운데 한 명은 데이비드 코이지스(David Koyzis)다. 필자는 약 1년 전 자신의 서브스택(Substack)에서 그의 글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번 글의 초안을 코이지스와 공유했고,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보내왔다.

코이지스는 정치 지도자들의 신앙이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민족주의나 이와 유사한 운동에도 아주 일부의 진실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따라붙는다. 그리스도인 정치인 역시 자신이 받아들인 정치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을 어떻게 왜곡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민족주의’나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의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고 해서 정의로운 통치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적으로 정통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공적 영역에서는 특정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단순하고 매력적인 설명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이 점은 정치의 본질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정치의 목적은 ‘장악’이 아니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

코이지스는 세상을 ‘지배’하거나 장악해야 한다고 쉽게 말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라는 활동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영국의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Sir Bernard Crick)은 고전 『정치를 옹호하며(In Defence of Politics)』에서 정치를 대략 ‘하나의 정치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을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그 출발점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물질적·비물질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제한된 지식과 서로 다른 경험, 각자의 편향된 관점 때문에 수많은 문제에서 의견이 갈린다. 이는 비기독교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정치와 경제, 교육, 복지, 외교, 사회정책을 둘러싸고 얼마든지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정치의 목적은 이러한 다양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수많은 의견 충돌에도 불구하고 한 사회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데 있다.

의회가 다양한 관점을 가진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제거하는 대신 논쟁하고 협상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공동의 결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정치관은 정치적 다양성 자체를 실패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타락한 세계에서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라는 이름이 이데올로기를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코이지스는 기독교 신앙이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인은 이데올로기가 신앙을 왜곡하는 영향력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정치적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리스도의 이름과 지나치게 밀착되면, 어느 순간 복음이 정치적 목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뒤바뀔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증언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과 다른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같은 정치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것은 신앙을 타협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확히 구분하라는 요청이다.

정치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공동선을 증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정치가 인간의 죄를 제거하거나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올 수는 없다. 정부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완성할 수도 없다.

코이지스가 지적하듯, 이것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뿐 아니라 한 세기 전 일부 사회복음주의자(Social Gospellers) 역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따라서 정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가 아니라 ‘신실한 전문성’

따라서 “공직자가 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단순한 ‘예’나 ‘아니요’로 대답하기 어렵다.

신앙은 사람의 도덕적 상상력과 인간관, 정의관, 책임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직자의 신앙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고백 자체가 전문적인 능력과 정치적 지혜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훌륭한 치과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듯,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만으로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를 운영하려면 헌법과 법률, 경제, 외교, 행정, 사회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시민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판단력과 협상의 능력도 요구된다. 무엇보다 자신이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제로 적용할 수 있다는 유혹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단순한 ‘장악’이 아니다. 신앙에 뿌리를 두면서도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갖추고, 다른 사람의 자유와 존엄성을 존중하며 공공선을 위해 봉사하는 신실한 전문성이다.

기독교인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여의 신뢰성은 명함에 적힌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앙과 인격, 실력과 겸손이 함께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공적 증언도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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