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당신의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Your truth' doesn't exist when God is speaking)를 2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우리는 어디에서나 “네 진리를 찾아라(Find your truth)”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소셜미디어에 넘쳐나고, 졸업 연설에 등장하며, 현대 문화 속에서 자유의 상징처럼 사용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힘을 주는 말처럼 들린다. 드디어 나의 이야기를 존중받고, 보이고, 들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같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목소리들이 억눌리고 무시되었기에,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치유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문구는 방향을 잃었다.
“네 진리를 찾아라”는 단순히 정직함을 권하는 말이 아니라 권위를 부여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부터 세계관을 구축하라는 명령처럼 변한 것이다. 개인적 자아가 현실 자체를 규정할 만큼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적으로는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마치 배가 자기 반영된 물결만 바라보며 항해하려는 것과 같다. 결국 좌초하게 된다. 모두가 자기만의 진리를 가진다면, 진리 자체가 녹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진리와 내 진리가 충돌할 때, 누가 양보하고 누가 상처받는가?
삶이 무너질 때 단순한 자기 확언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우리는 목소리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닻(anchor)이 필요하다.
성경, 외부에서 오는 객관적 진리
여기서 성경이 등장한다. 단순한 민속이나 도덕 규범이 아니라, 우리 바깥에 뿌리내린 객관적 진리로서 자신을 제시한다. 학자들은 이에 대한 근거를 충분히 설명해왔다. 방대한 사본 증거, 수세기를 걸친 정확한 전승, 고고학적 발견의 뒷받침, 확률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성취된 예언들. 성경은 우리가 가진 고대 문헌 중 역사적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문서임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필자는 고고학자처럼 파편을 수집하거나, 역사가처럼 연대기를 맞추는 방식으로 성경을 대하지 않는다. 수많은 상담실에서 ‘자기 발명(self-invention)’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진 사람들과 마주한 심리학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다. 그때 발견한 것은 성경이 단순히 사실적으로만 참된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도 참되다는 점이다. 성경은 단순히 정보를 주는 책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를 이토록 정확하게 읽어내는 책은 없다.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소망, 사랑
심리학은 죄책감을 왜곡된 감정으로 취급하며 조용히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책감을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 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한다.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시편 51:4)라고 고백한다. 이는 병리가 아니라 도덕적 명료성이다. 그리고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심리학이 줄 수 없는 것을 제시한다. 곧 용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수치심 역시 마찬가지다. 창세기 3장은 그 모습을 정확히 묘사한다. 무화과 잎, 숨음, 거리감. 그러나 성경은 수치심을 외면하지 않고 덮어주신다. “그를 앙망하는 자는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4:5).
두려움은 단순한 생물학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심판, 버림, 죽음이다. 타락 이후 처음으로 인간이 한 말은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10)였다. 그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이사야 41:10)고 말씀하신다.
소망 역시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 견고하고 튼튼하다”(히브리서 6:19). 이는 감상이 아니라 실체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5).
사랑은 가장 흔하게 쓰이는 단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십자가로 정의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았고”(요한일서 3:16). 추상이 아니라 피요, 감정이 아니라 희생이다.
왜 성경은 불편한가?
사람들이 성경을 거부하는 이유는 대부분 사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자기 자신을 너무 정확히 폭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정과 위로를 기대했지만, 성경은 우리의 교만과 욕망을 드러낸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우리를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성경을 거부하는 그 행위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을 증거한다. 성경은 우리의 저항까지 예측하고 해석한다. 단순히 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 성경은 은혜를 선포할 뿐 아니라, 왜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결론: 진리는 하나뿐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정직하게,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부드럽게 말한다.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갈망을 정확히 짚어내고, 용서, 덮으심, 임재, 소망, 사랑을 제시한다.
성경은 단순히 연구할 유물이 아니며, 해시태그로 소비할 슬로건도 아니다.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다. 문화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진리, 스스로 발명할 필요가 없는 진리, 안식할 수 있는 진리이다. “당신의 진리”를 찾으려 애쓰지 말라. 진짜 진리가 이미 당신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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