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400년 동안 예언자의 소리가 숨죽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던 이방여인들과의 관계, 물질적 부정부패, 자기의 이익을 위해 탐욕적 생활을 하다 하나님으로 부터 채찍을 맞아 바벨론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삶의 행태에 대한 예언자들의 경고가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는,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사 1:4)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사 1:5)라고 부르짖고 있다. 또, 하박국 2:9에는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요즘 말로 말하면 부동산 투자가 아닌 투기를 하는 행위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민족, 국가들이 당시에 많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적 징벌이 없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70년 동안 노예와 같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이후, 그리스의 침략과 로마의 식민통치로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황폐화 되다시피 했다. 사두개파인들은 로마에 협력하는 상황 속에서 바리새파인들은 그나마 율법을 붙잡고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법률유지는 형식에 치우쳐 있어 말씀의 본질이나, 중심사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본질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 축자적 법해석을 통한 법준수가 먼저였다. 법정신보다 법집행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들을 통해 이유와 원인이 빠진 사안은 항상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실성을 찾기 어려운 사회였다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세례 요한이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외쳤다. 에언자의 소리가 없다가 근 400년 만에 다시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아들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의 첫 메시지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천국의 성품이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의 주인임을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본질을 바라보지 않고,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지적한 예수에 대해 바리새파인들은 심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리새파 인들의 안식일 논쟁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본질 지키기와 형식 지키기의 충돌인 셈이다.
신앙에서 어떤 문제가 있으면 당연히 지적을 하거나 꾸짖거나, 개선하기 위한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그러한 예언자적 의식을 가지고 목회와 신학 연구를 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신학자체의 사명인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이론적으로만 다루려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뒷전에, 아니면 객화(客化)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 그리고 생활과는 무관한 이론적 내용과 연구방법론 위주로 한다. 그럴 경우, 인간학 측면이 전면에 나타나는 신학을 하게 된다.
목회도 한가지다. 신학과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대체로, 학문적 토대는 빠지고 성도들의 마음에 비위 맟추는 감성 형태의 목회를 한다. 관심을 끌기 위해 예배처소를 화려하게 한다든가, 세속사회의 문화 형태를 도입하여 적용한다든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성도들의 관심을 갖도록 하는 설교나 목회를 한다. 개인이나 가정의 현실적 삶의 문제를 터치하지 않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는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 설교나 목회를 한다. “회개하라”는 말을 그들의 설교에서 듣기 어렵다. 본인들이 회개하려는 마음이 없는데, 그게 될 수 있을까? 교회크기 자랑이나, 교단의 정치적인 권력 곧 교권주의에 빠지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교단적 위상이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이해타산에 빠지는 비성경적 인본주의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5:8-9에서,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 말씀하고 있는데, 이와 같다 할 수 있다. 주인 없는 객의 활동만이 왕성한 격이다. 흔히 하는 비유처럼, 달을 바라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가리키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게 하는 목회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들의 신앙이 진실 될 수 있을까?
첫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왜 부정적으로만 보느냐?” 그게 아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구약의 예언자들 모두 부정적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존의 율법주의자들과 대립도 부정적인 행동을 한 것이라 말 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아닌 것이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긍정성을 세우려 하신 것이다. 목회자는 이러한 매의 눈을 가져야 하는데, 편안한 환경을 울타리로 하여 나만 잘 되면 그만인 목회를 하고 있으니 교회가 바로서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이론과 실천이 항상 동반되는 신학이나 목회를 해야 한다. 행동화 하거나 행동화 할 수 없는 설교나 학문은 사변에 그치게 되고 만다. 이론과 실제가 결합할 때 파워가 생기는 것이다. 기능이나 역할은 다르지만, 양면성은 항상 동반되어 있는 구조인데. 그런 구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나 존 웨슬리가 신학과 목회의 좋은 모델이 된다. 신학적 이론을 제시하고, 행동화 하였기 때문이다. 21세기, 지금 이시대에 루터 칼빈 웨슬리의 주장과 목소리에 귀를 진지하게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태복음 1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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