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그 리드 목사
더그 리드 목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더그 리드 목사의 기고글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체할 수 있다면 교회도 대체할 수 있다’(If God can replace Israel, He can replace the Church, too)를 2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리드 목사는 현재 뉴욕 버팔로의 더 태버나클에서 20년 넘게 근무하고 있으며 페사치 월리치 랍비와 함께 '숄더 투 숄더' 팟캐스트를 공동 진행하며 신앙, 문화, 이스라엘 분야의 글로벌 리더들과 소통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해가 여전히 뜬다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언약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이 예레미야 33장이 제시하는 놀라운 논리이다. 창조 질서의 고정된 순환이 유대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깨질 수 없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신학적 혼란이 커지고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는 시대에, 많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 흔들리고 있다. ‘대체신학’은 다시 돌아왔고, 더 “존중받는” 옷을 입은 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하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어기신다면, 당신에게 주신 약속도 어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정말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철회하셨는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했는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존속은 해돋이만큼이나 확실한 일인가?

그 해답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분명하고 단호하게 전해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를 돌아오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예레미야 33:25-26)

이 두 구절은 예언적인 책망이자 신학적 닻과도 같다. 하나님 자신이 기준을 세우셨다. 낮과 밤의 리듬이 멈추고,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 무너지는 경우에만 이스라엘을 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시적인 과장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확정된 선언이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창조 질서와 직접 비교하신다. 인간이 해 뜨는 것을 멈출 수 없고, 밤의 도래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나라나 교회, 이념이나 신학 체계도 야곱의 자손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화할 수 없다.

이것은 구약에 국한된 관점이 아니다. 창세기 17장 7절에서도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을 말씀하신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영원한”은 일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나 “너희가 잘못하지 않을 때까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 신약은 구약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다.

예수님 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5:17)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대 이스라엘의 세속성, 정치적 결함, 역사적 예수 거부를 지적하며 비판하지만, 예레미야는 이미 이렇게 예견했다: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그들의 행동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반복해서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며,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

사실 로마서 11장은 대체신학에 대한 바울의 결정적 반박이다. 그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로마서 11:18)

우리는 그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일 뿐이다. 나무 자체를 대체한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은 단지 신학적인 논점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에 매우 실질적인 의미를 준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버리실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요한복음 3장 16절이나 로마서 8장을 신뢰할 수 있는가? “영원”이 “추후 공지 시까지”를 뜻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확신이 남겠는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것은 현대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정치적 결정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함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예언적 시간표에 동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신 모습을 잊게 되면, 우리는 은혜와 언약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약화된다. 예레미야의 말은 그러한 타락에 대한 예언적 해독제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문화 트렌드나 인간의 여론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에 기초한다.

약 2천 년의 디아스포라(흩어진 삶) 끝에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재건은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충실히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기적이다. 역사상 어느 민족도 온 세계에 흩어졌다가 조국으로 돌아와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회복한 적이 없다. 예레미야는 이 또한 예언했다: “내가 그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하리라.”

교회는 이 기적을 경외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예언적 의미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성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역대상에 나오는 잇사갈 자손들처럼, 시대를 분별할 책임이 있다.

예레미야 33장 25~26절은 모호함이 없다.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언약은 해가 뜨는 것만큼 확고하고, 별이 고정된 것만큼 영원하다. 이것은 교회가 부차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성경의 신뢰성, 그리고 구속사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중심적인 문제이다.

재건된 이스라엘 국가와 유대인을 지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동조하는 일이다. 야곱과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깊이를 아는 것이고, 그분의 약속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목적에 나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신학의 오만함을 버리고, 접붙여진 자의 겸손함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소망하며,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예루살렘이 온 땅의 찬송이 될 그날을 고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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