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ChatGPT가 방언으로 말하지 않는 이유’(Why ChatGPT doesn’t speak in tongues)를 2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래전, 필자가 알고 지내던 한 목회자의 아들이 호기심에 방언을 말하는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교회에서는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 방언을 하고, 곧이어 다른 사람이 일어나 그 내용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고린도전서 14:27을 따른다고 주장하며 말이다).

목회자의 아들은 장난삼아 일어나 라틴어로 주기도문을 외운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한 교인이 일어나 전혀 엉뚱한 내용을 “통역”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라틴어로 된 주기도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최근 ‘Christian Post’의 기사 ‘ChatGPT는 방언을 해석할 수 있을까?’를 보면서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방언을 말하는 것이 교회에서 정상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은 여전히 민감한 이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다.

하지만 지금 어떤 입장에 있든, 우리는 이 문제를 짧고 체계적이며 성경적인 접근을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왜 ChatGPT가 방언을 말하지 않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다.

두 가지 중요한 구분

가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자의 중요한 역할은 "구분짓기"라고 말했다. 성경에서 방언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두 가지 핵심적인 구분을 해야 한다.

첫째는 성경의 서술(descriptive) 과 명령(prescriptive) 의 차이다. 성경에는 다양한 사건과 행동이 ‘서술’되어 있지만, 그것이 곧 우리에게 ‘명령’된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2장이나 고린도전서의 몇몇 장면은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것이지, 모든 시대에 적용해야 한다는 명령은 아니다.

<신약의 방언 가르침>(New Testament Teaching on Tongues)의 저자 메릴 웅거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오순절에 나타난 초자연적 언어 현상은 전 세계 복음 전파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전조였고, 이는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적이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자들에게 이를 성취하고 그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할 수 있도록 하셨다.”
바울 역시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전 11:22). 오순절은 그런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표적이었다.

둘째는 기적의 ‘사실(fact)’과 ‘은사(gift)’의 차이이다. 성경 전체에 기적의 사건들은 넘쳐나지만, 기적적 ‘은사’는 세 번의 짧은 시기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즉, 모세 시대, 엘리야·엘리사 시대,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다. 이 세 시기에는 거짓 신과 교리를 반박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확증하며, 불신자에게 경고하는 도구로 기적적 은사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 은사는 그 시대가 지나면 함께 사라졌다.

방언은 무엇이며, 왜 주어졌는가?

이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정의를 살펴보자. 사도행전 2장에서 “다른 방언들로 말함”(glōssa, 2:4)과 그 말을 “자기네 언어로 들었다”(dialektos, 2:8)는 표현은 분명하게 방언이 실존하는 ‘언어’(dialect)였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자면, 방언은 예를 들어 일본어나 러시아어처럼 배운 적 없는 실제 언어를 갑자기 말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린도전서 13:1에서 바울이 “천사의 말”을 언급하거나, 14:2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고 말한 구절을 들어, 방언은 인간 언어가 아닌 신비한 언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바울은 아마도 과장법(hyperbole) 을 사용했거나 가정(hypothetical) 의 형식으로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의 경우는 <바이블 지식 주석>의 데이비드 K. 로워리 박사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구절의 문맥은 고린도 교회의 공적 모임 안에서 통역 없이 방언이 사용되는 상황이다. 아마도 그 자리에는 해당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방언은 ‘신비’였고, 하나님께서 그 모임에 해석을 주지 않으셨기에 이해되지 않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방언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신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한다: “율법에 기록되었으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들과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며,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 (고전 14:21-22)

이 말씀은 이사야 시대 유대인들이 분명한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거부한 것처럼,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이 아람어(앗수르 언어)로 심판하셨다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다. 즉, 방언은 불신자에게 주는 경고의 표적이다.

결론: 방언은 경고였다

신약 성경에서 방언은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한 직후 나타난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복음을 거절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른 언어로 복음을 경고의 메시지처럼 들려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방언은 교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강력한 경고였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은 오늘날 교회에서 ‘입장권’, ‘성령세례의 증거’, ‘더 깊은 영성의 표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정직하게 다시 살펴보고, 그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ChatGPT가 방언을 말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당 CP 기사가 마지막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방언을 분석한 인공지능은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것은 실제 언어에 대응되지 않기 때문에 문자적 번역이 아니라 창의적인 해석입니다.” 따라서 그 자체가 명확한 결론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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