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나는 어릴 때부터 질문을 많이 던지는 아이였다. 그만큼 호기심이나 궁금증들이 많았고, 그걸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성격을 가졌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접근하면 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이 다 도망을 가곤 했다. 또 골치 아픈 질문을 던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난 그때 깨달았다. 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은 대부분이 별 질문 없이 산다는 사실을 말이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도무지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질문 자체가 몸에 배질 않았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주입식 교육을 계속 받다 보니 그저 ‘암기 기계’로만 살아온 것이다.

특히 성경을 대함에 있어서 의문을 제기한다는 자체가 은혜가 되지 않고 믿음 없는 증거라는 식으로 오해를 많이 받아왔다. 그래서 궁금증이 유발되고 의문점이 생겨도 도무지 질문을 하지 않는 게 습관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매일 성경을 해석하면서 절감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날이 갈수록 성경을 보는 눈이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얼마나 깊고 무궁무진한지는 체험해보지 않은 이는 알 수가 없다. 그 깊고 오묘한 성경 속 진미를 맛보고 경험하는 행복과 즐거움보다 더 큰 것은 내게 없다.

오랫동안 궁금증을 갖고 있었던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딤후 3:5절 말씀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어린 시절 성경을 읽으면서 궁금증을 가졌던 성경 구절들이 참 많았다. 딤후 3:5절은 그 중 한 구절이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구절들을 하나씩 해결하고 정리해왔었는데, 이 구절만큼은 아직도 내게 풀리지 않은 숙제였다.

이런 본문은 딱 한 번만 읽어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내가 궁금해했던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설교하는 모습을 본다.

그뿐 아니라 본문이 말하지 않는 내용으로 설교하거나 주석을 쓴 이들도 많음을 알게 되었다.

딤후 3:5절의 내용을 한 번 보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고 되어 있다. 한 번만 읽어도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팍 와야 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경건의 능력은 ‘없나니’...”라 되어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 되어 있음이 보이는가? 사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라 해야 이해가 쉽다.

그런데 ‘경건의 모습은 있으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되어 있으니, 그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경건의 능력을 갖고 있는 듯하나 실상은 경건의 모양만 보이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구절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래서 ‘부인하다’의 원어를 찾아보았다.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라는 헬라어로, ‘부인하다’(deny), ‘무시하다’(ignore, disregard), ‘조롱하다’(disdain)라는 뜻을 갖고 있다.

본문의 문맥도 살펴보았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바울은 마지막 시대에 있을 ‘불경건의 특징’을 논하고 있다. 5절에서 그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며 “이런 자들을 피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의 의미가 뭘까를 생각해야 한다. 딛 1:16절에 비슷한 사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말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로서 한 마디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부정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딤후 3:5절이 그와 같은 자를 말한다. 경건을 갖춘 체하지만, 실제로는 ‘경건의 능력이 자기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라는 말이다.

경건의 능력을 갖춘 자가 해야 할 선한 행위를 순종하지 않고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자이다. 경건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경건의 능력 발휘를 거부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임을 바울이 지적한 것이다.

설교의 왕자인 로이드 존스가 이렇게 말했다. “If you try to imitate Christ the world will praise you; if you become Christlike it will hate you.”

“당신이 그리스도의 모양만 내려 하면 세상은 당신을 칭찬할 것이고, 그리스도 같은 사람이 되면 당신을 미워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모양새만 갖추고 산다면 세상에서 욕먹을 일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구별된 삶을 산다면 세상에서 당할 핍박이 많은 게 사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부요한 삶을 좋아한다. 그러기에 경건의 모양새 갖추는 건 원하지만, 그 경건이 능력이 이끄는 대로 구별되이 사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런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지 않는지, 내 모습부터 한 번 곰곰이 분석하고 점검해보련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나 유대주의자들처럼 형식주의적이고 외식주의적인 자들이 오늘 교회 안이나 노회나 총회 내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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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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