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귀선 사모
하귀선 사모가 과거 다니엘기도회에 강사로 참여했던 모습 ©다니엘기도회

국군중앙교회에서 지난 16일 하귀선 사모(사모다움선교회)가 간증을 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7년간 폐결핵을 앓은 곤고했던 인생 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했다.

하 사모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결핵을 앓았고 수없이 많은 시간을 병원으로 또 다른 병원으로 옮겨 입원하는 일을 17년 동안 반복하면서 살았었다. 또 밤새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거의 누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심할 때는 일 년 동안 바닥에 등을 한 번도 대어보지 못했다. 그때 저의 간절한 소원은 베개를 베고 누워서 한 시간이라도 자는 것이었다. 그 전엔 사람이 누워서 자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앉아서 밤을 새워 보니까 누워서 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의 조건인지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다”고 했다.

이어 “피를 토할 때는 새벽이고 밤이고 예측할 수 없었기에 커다란 세숫대야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코와 입에서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듯 피를 토해내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루는 방에 혼자 있는데 세숫대야를 가져다 놓을 겨를도 없이 방안이 흥건하도록 피를 토하고, 제가 토해 놓은 피를 보고 놀라서 기절했었다. 중환자실에서 엄마의 통곡소리에 눈을 뜬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제 상태가 산소량을 조금만 줄여도 호흡이 끊어지고 더군다나 수혈받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피를 토하고 있어서 며칠 못 갈 거라고 했다. 엄마도 뼈밖에 없는 몸으로 산소를 꽂고 피를 토하는 저를 보고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건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의학으로는 며칠 갈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서 그리고 부족한 저에게 미련이 남으셔서 그 위독한 환경 속에서도 저를 데려가지 않으셨다.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 정도는 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시켜 주셨다”고 했다.

하 사모는 “저는 전국의 결핵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입원을 해봤었다. 국립마산결핵병원에서는 그 병원이 생긴 이래 최연소 결핵 환자로 입원했었다. 선생님은 저의 차트를 보고 이미 약에 내성이 너무 와서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집으로 돌아가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 먹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결핵약이 개발되면 제일 먼저 연락하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저는 집으로 돌아갈 상황이 못 되었다. 저는 병이 낫든 낫지 않든 병원에 있게 해달라고 울며 부탁했다. 선생님은 한참 고민하다가 병원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고 했다.

이어 “선생님과 면담을 마치고 병원 안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다. 병실에서 교회까지 2~3분이면 뛰어갈 수 있는 짧은 거리를 숨이 차서 몇 걸음 걷다가 주저앉아 쉬고 또 몇 걸음 걷다가 피를 토하면서 갔다. 그렇게 차가운 교회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참 많이 울었다. 울다가 지칠 만큼 울고 나니까 죽음은 현실이었고,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한 번만 만나주시면 죽음의 두려움은 잊고 천국에 대한 확신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남은 삶을 살겠다고 기도했었다”고 했다.

이어 “그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으로 생각한 게 말씀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제 평생에 읽을 성경을 다 읽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말씀을 보는데 잠언에 나를 간절히 찾는 자를 내가 만나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활자로 다니는 것 같았다. 그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내 간절함을 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한 게 새벽기도였다. 저 같은 결핵 환자는 새벽만 되면 숨이 더 많이 차고 찬바람을 조금만 맞아도 기침이 심해진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작정한다는 건 진짜 내 믿음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 그 강력한 힘에 이끌려서 그 기도의 자리로 몰아가시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하 사모는 “새벽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무나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너는 보는 거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주님은 내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언제나 평안함으로 늘 나와 함께하신다는 걸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 긴 고난 속에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니까 가난한 모습, 병든 모습은 그대로인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받은 사람은 신세 한탄하고 울고만 지내지 않는다. 저는 누군가에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쁜 호흡을 쉬는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주의 일이 무엇인지 기도했고, 주님은 중환자실을 기억나게 해주셨다. 중환자실 환자들은 일반 병실로 옮겨간 환자들이 자신을 돌봐주러 와줄 때 희망을 가진다. 저는 중환자실에서 최선을 다해서 환자들을 섬기고 또 죽음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환자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 제가 만난 하나님, 천국에 대해 열심히 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중환자실 봉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약과 주사로도 치료되지 않고 17년 동안 저를 괴롭혀온 결핵균이 모두 떨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핵균은 없어졌지만, 왼쪽 폐는 하나도 없고 오른쪽 폐는 하엽만 있다. 거의 폐기능을 상실한 그 작은 폐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없어진 폐만큼 폐활량을 못해서 평지를 걸어도 숨이 차고 2층 계단을 오르려면 몇 번을 쉬어야 한다. 그런 제가 이 호흡으로 찬양할 때는 별로 힘들지 않다. 이제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당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를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행여라도 제 생명을 연장해주신 걸 후회하지 않도록 제 남은 삶이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아름답게 쓰임 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하 사모는 “저는 하나님이 주신 장애인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몇년 전부터 결핵 환자도 장애인증을 주도록 법이 바뀌어서 저는 마산결핵병원에 장애 진단을 받으러 갔었다. 원장님이 저는 의학적으로 1급 장애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인데,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작은 폐를 가지고도 건강하게 살아가니까 2급 장애를 주셨다”며 “의학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저를 치료해 주셨다는 걸 검증 받았다”고 했다.

이어 “선생님은 제가 폐 이식 대상이 되는지 진단서를 끊어주셨다. 중환자들이 폐이식 수술을 하고 4개월이 지나면 등산하러 다닐 정도로 예후가 좋은 걸 보고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병원에선 오랜 시간 폐가 비어 있던 공간에 다른 장기가 자리 잡아서 건강한 폐를 집어넣을 공간이 없다고 하셨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니 믿음과 상관없이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나 얼른 눈물을 닦고 하나님께 ‘제 건강, 제 생명을 의사들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직접 저를 돌보려고 하시는 거죠. 제 목숨은 하늘이 돌보는 목숨이니 하나님 책임져 주세요’라고 고백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5%밖에 없던 폐활량에서 폐 이식에 성공해서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린다고 간증하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폐 이식 수술을 해서 건강해져야만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게 아니다. 누구나 15%밖에 없는 폐활량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헉헉거리는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면 영광 돌리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그 고난, 그 십자가를 가지고 묵묵히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될 거로 생각한다”고 했다.

하 사모는 “코로나 확진으로 음압병실에 갔었다. 아무도 제가 살아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0일 동안 음압 병실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의 시간, 두려움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하나님이 저를 만나주셨다. 하나님께선 이 병원에 수많은 사람이 다 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 내가 너를 살려줘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셨다”고 했다.

이어 “그때 제가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저는 목회의 무게 위에 가난의 짐까지 안고 살아가는 작은 개척교회 사모님들과 30년 세월을 함께했다.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사는 것 같은 사모님들에게 새 옷은 못 사드려도 젖은 옷을 보송보송 말릴 장소는 제공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15년 전에 사모다음선교회를 발족하고 매년 3월 5일을 사모의 날로 정해 모임을 하고, 사모 쉼터를 진행하면서 사모대학도 진행하고 있다. 저는 그 음압병실에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그 사명을 발견하고 왔다”고 했다.

이어 “제 상태를 옆에서 보고 걱정하는 분들은 사역하지 말고 쉬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건강하게 10년, 20년을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 있어서 그것에 내 생명을 걸 수 있다면 저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사모님들과 함께 사역하고 싶다”며 오늘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살려줘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주님 앞에 그 답을 고민해보길 바란다“고 했다.

또 “제가 죽음 앞에 먼저 가봤던 사람으로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 제 평생에 가장 좋아하는 찬양이 있다. 제가 숨쉬기도 어렵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그 절망적인 시간에 병실 불이 꺼지면 수백 번, 수천 번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찬양했다. 인생 찬양을 꼭 가지고 그 찬양 속에 신앙을 담고 힘들고 외로울 때 그 찬양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면 좋겠다. 그렇게 말씀과 찬양이 균형을 이루면서 아름답게 살면 좋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저는 늘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고 있다. 언제 어떻게 호흡곤란이 올지 모른다. 그래서 저는 사람을 대할 때 오늘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 또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내 생명을 찾아가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늘 준비하고 있다. 제 첫 마디는 ‘주님 감사합니다’이다. 곤고한 제 삶의 여정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감사하다고 고백할 때 보좌에서 내려와서 저를 꼭 안아주실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데 잘 살아줘서 내가 더 고마웠다고 그렇게 주님 앞에 칭찬받고 싶다”고 했다.

아울러 “며칠 가지 않는 사람의 칭찬 때문에 행복하고 불행한 인생이 아니라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거 아무도 몰라줘도 주님과 나눌 수 있는 추억거리가 많은 인생이 되면 좋겠다. 환경 때문에 조건 때문에 행복한 게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길 바란다”며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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