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네트워크 창립 2주년 기념행사
행사 모습. ©노형구 기자

우남네트워크 창립 2주년과 신철식 상임대표회장 취임을 겸한 ‘6.3 정읍선언 77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이승만의 정읍선언과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는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선언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비판이 자주 제기된다”며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해방 전후 정치 구도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승만이 분단을 과연 주장했는가. 이승만은 남한과 북한의 통일 정부를 추구했다. 이승만의 꿈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자유통일이었다”고 했다.

박 박사는 “해방 직후 38선을 중심으로 미소 양군의 한반도 점령은 한반도 분단을 염려하게 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카이로 선언에 동의한 소련을 신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대로 소련이 한반도 공산화를 부추길 요인으로 봤다”고 했다.

그는 “이승만 박사가 해방 직후 네 나라 정상에게 전보를 보냈다. 먼저 1945년 8월 15일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냈다. 그는 이 전보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부는 통일민주정부다. 소련이 도와준다면 소련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을 하지 않고 세이프가드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교두보로 소련을 침범하리라는 소련의 걱정을 이 박사가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박사는 “이승만 박사는 같은 해 8월 21일 영국의 애틀리 수상에게 전보를 보냈다. 그는 이 전보에서 ‘폴란드가 소련에 넘어간 것이 유럽의 안보에 위협이 됐던 것처럼, 한반도가 소련에 넘어간다면 동아시아는 공산화될 수 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한반도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며 “같은 날 장개석과 트루먼에게도 소련의 음모에 동조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박 박사는 “이승만은 1945년 11월 초 통일정부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실행하고자 남한의 이승만·김구, 북한의 조만식·김일성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추진하려고 했다. 이를 조만식을 통해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당시 소련군 중장 스티코프의 일기에 따르면 ‘그(조만식)는 11월 15일 김일성과의 대담에서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정부의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나왔다”며 “그러나 김일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1946년 모스크바 외상 회담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됐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2월 말 이승만, 김규식, 김구가 참여하는 민주의원 개원식을 통해 ‘선 자주정부 수립, 후 통일독립한국 수립’을 주장했다. 민주의원을 발전시켜 과도정부를 만들고 유엔의 회원국으로 만들어 국제사회에서 소련을 압박하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라고 했다.

우남네트워크 창립 2주년 기념행사
(왼쪽부터) 박명수 박사, 양준석 박사 ©노형구 기자

그는 “이승만은 1946년 3월 20일 미소공위를 앞두고 입장을 선회했다. 이승만은 미소공위 체제 안에서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마련했다”며 “이승만은 그해 4월 8일 기자회견을 갖고 남북한이 합작하는 임시정부를 세우려면 그 전제는 38선 철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가 표현될 수 있다고 했다”고 했다.

그는 “이승만은 그해 4월 17일 남한순행의 첫 집회인 천안에서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의 통일적 정부수립에 노력 중이니 우리는 이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고 연설했다. 그러나 5월 6일 1차 미소공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미군정이 국무성의 압력으로 이승만과 김구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했고, 소련이 김규식이 포함된 남한의 협상 대표 자격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박사는 “이에 분노한 이승만은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고 자율정부수립과 38선 철폐를 주장했다”며 “미소공위 결렬로 이승만은 5월 10일 서울로 돌아왔고 미국에서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은 다시 남선순행을 재개했고 그해 6월 3일 정읍에서 발언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세 가지로 요악된다. 첫째, 미소공위의 재개가 어렵다. 둘째, 3.8선 철폐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은 비관적이다. 셋째, 이러한 상황 탓에 남한의 단독 임시정부 수립 여론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당초 미소공위를 통해 소련의 38선 철폐를 이끌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정읍발언을 통해 먼저 남한에 임시정부를 만들어 이것을 근거로 국제사회에 압력을 통해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며 “따라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단독정부 수립이 목표가 아니라 국제사회와 협력해 통일정부 수립이 궁극적 목적”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므로 이승만의 임시정부 수립을 한반도 분열의 출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토론은 양준석 국민대 교수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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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노형구 기자

한편, 오영섭 박사(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는 ‘이승만의 정읍선언에 대한 정당과 사회단체 및 언론의 반응’, 최창묵 박사(얼역사연구소 소장)는 ‘이승만의 정읍선언과 민주성지 정읍의 근현대사’를 발제했다. 각 순서대로 토론자는 이은선 박사(안양대 교수), 이승호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맡았다.

이날 앞서 1부 선서에는 강효상 공동대표(경인방송 대표이사)가 개회사, 신철식 상임대표회장(우호문화재단 이사장)이 취임사, 손병두 이사장(호암재단)·인보길 회장(뉴데일리)이 축사를 전했다.

신철식 우남네트워크 상임대표회장는 취임사에서 “6.3 정읍선언에 대해 남북 분단의 원흉이 이승만이라고 오도하고 있다. 6.3 정읍선언은 북한을 소련의 위성 공산국가로 세우려는 야심을 미리 간파한 선지자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워 자유통일국가 건설을 이루려 한 역사적 대선언”이라며 “그 배경과 진실이 이번 학술세미나를 통해 드러나 국민통합을 이루고 자유대한민국 역사로 알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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