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환 선교사가 간증하고 있다.
고석환 선교사가 간증하고 있다. ©명암교회 영상 캡처

명암교회(담임 유영기 목사)가 지난 26일 색소포니스트 고석환 선교사를 초청해 찬양간증집회를 개최했다. 이날 집회에서 고석환 선교사는 하나님을 만나 복음전도자로 변화된 삶을 간증하며, 찬양과 색소폰 연주를 통해 감동을 전했다.

고 선교사는 “저는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저주하고 원망하던 완악한 자였다. 그런 저를 하나님이 찾아와 만나주셨다.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제가 깨달은 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었다. 제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은 나팔을 매고 길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증거한 것이었다. 성경도 모르고 찬송도 모르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을 만났지만 (혈액암으로 인해) 피는 계속 쏟아졌다. 그러나 피가 쏟아지는 건 문제가 아니었고 죽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빨리 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의 120문도가 성령을 받으니까 복음을 전한 것처럼 저도 복음을 전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다.

이어 “성경도 찬송도 아는 게 없는데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기억나게 하셨다. 명동 술집에서 일하고 나올 때 구세군이 종을 치며 부르던 찬양,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성령님을 통해서 기억나세 하셔서 성경을 찾았다. 그 말씀을 나가서 전하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저를 또 붙잡으시고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이 찬양이 기억나게 하셨다. 저희 외갓집은 기독교 집안이었는데 외할머니는 저만 보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술 먹는 귀신은 손주 몸에서 떠나라고 외치셨었다. 그 할머니의 18번 찬양이었다. 할머니가 어린 저를 안고 얼마나 그 찬양을 많이 불렀겠는가. 하나님은 어린 제가 들었던 것도 기억나게 하셨다. 그렇게 말씀 하나, 찬양 하나가 기억나자 그때부터 얼마나 담대해졌는지 모른다. 전하는데 두려울 게 없고 부끄러울 게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나팔을 불다 보면 피가 줄줄 샜다. 그럼 생수로 대충 부어 닦았다. 악기에 침 하나만 묻어도 세 시간씩 닦던 제가 3,500만원 짜리 악기가 귀중하지 않았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데 오로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나팔을 부는데 하혈을 너무 많이 해서 기저귀가 젖어 바지가 내려가면 골목에서 생수로 대충 씻고 다시 기저귀를 차고 복음을 전했다. 사람들은 부끄럽지 않냐고 손가락질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고, 복음을 전하는 자는 세상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했다.

고 선교사는 “그렇게 노방 전도를 시작했는데, 저는 한 번도 하나님께 이 일을 할테니 살려달라고 기도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4일째 되는 날, 피가 멈추더니 한 달을 넘기고 1년, 10년을 넘기고 21년째 하나님께서 저의 호흡을 연장시켜주고 계시다. 더 감사한 것은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이 호흡을 하나님을 전하는데 사용해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호흡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은혜의 시간인줄 믿는다”고 했다.

그는 “2017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제 스승이다. 21년을 전신마비로 누워계시던 아버지는 저에게 매주 한곡씩 녹음해서 보내라고 하셨다. 녹음해서 보내면 아버지는 지적을 하셨고 저는 나중에 귀찮아서 보내지 않았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친척들에게 인사드리러 갔는데, 보는 분마다 저에게 나팔을 잘 분다고 칭찬하셨다. 아버지가 제가 보낸 찬양을 가지고 누워서 복음을 전하고 계셨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 내 눈앞에 보이는 아버지의 은혜도 깨닫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전할 수 있겠냐는 회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찬양 하나가 들리는데, ‘아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찬양이었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셔서 우리에게 고백하게 하신다고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라고 했다.

고 선교사는 “하나님이 제 호흡을 연장해주시자마자 제 입술에서 나온 고백은 ‘하나님 저 좀 더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경책을 들고 오산리 기도원에 들어가 21일을 금식하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눈물 흘리며 성경을 보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21일째 되는 날 쓰러져 누워 있는 저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그때 보여주신 말씀이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말씀이었다”라고 했다.

이어 “그 말씀을 들고 내려와서 전 재산을 하나님께 다 드리고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대합실, 마을 어귀 등 사람들만 모인 곳이면 나팔을 불면서 복음을 전했다. 잘 곳이 없으면 차에서 자고, 교회 집회 후 한숨 재워주면 거기서 자고, 기름이 없으면 주유소에서 알바해서 기름을 채우고 다음 동네로 갔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비닐봉지에 물을 채워서 샤워하면서 그렇게 3년 4년을 혼자서 복음을 증거하며 다녔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외롭지 않았다. 성경 말씀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 그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주님께서 항상 저와 동행해 주셨다. 그때부터 1년에 약 150군데를 사역하세 하시고 코로나 기간에도 저의 사역은 멈추지 않았다. 19개국 남미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지금은 필리핀 쓰레기촌에서 19년째 아이들을 섬기며 사역하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는 찬양사역자가 아니라 복음전도자, 선교사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는 곳이면 마약촌이든 우범지대든 공산국가든 어디든 가서 복음을 증거했다. 중국에선 공안에 쫓겨 도망가다가 갈빗대가 3대나 부러졌고, 여섯 번의 심장마비에 죽을 고비를 수차레 넘기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했다.

 

고석환 선교사가 색소폰으로 찬양을 연주하고 있다.
고석환 선교사가 색소폰으로 찬양을 연주하고 있다. ©명암교회 영상 캡처

고 선교사는 “한번은 하나님께서 이슬람으로 보내셨다. MBB사역하는 선교사님들과 8일 동안 복음을 전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사역이다. 마지막에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서 집회를 하려는데 선교사님께서 오늘 종교경찰이 온다며 오늘은 하나님의 ‘하’도 꺼내면 안 된다고 했다.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두 시간 동안 팝송을 부르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노방전도 때 항상 부르던 ‘마이웨이’를 부르게 됐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갑자기 ‘안 왔으면 몰라도 왔으면 전해야지’라는 음성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제 마음을 울렸다. 노래가 끝나고 식사시간에 선교사님들과 함께 기도했다. 선교사님들의 동일한 오늘이 그날이면 순종하겠다는 것이었다. 구속당하면 구속당하고 추방당하면 추방당하고 순교하면 순교하겠다는 것이었다. 저는 사람들을 다시 모으고 저를 여기 보내신 분을 소개 못했다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개했다. 그때부터 간증을 하는데 갑자기 이슬람 남성 한 명이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더니 앞으로 나왔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는데 제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당신을 여기 보내신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우리 자녀가 들어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아까 소리 지른 건 부인을 자녀에게 보낸 것이었다”고 했다.

이어 “마을 촌장님은 왜 선교사라고 말 안했냐며 사람들을 데려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자리에 모인 150명의 사람들이 사람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은 업어서 손에 잡고 데려오고 야전 침대를 줄로 매달아서 사람을 내리는데 순식간에 1,0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그때부터 복음을 전하는데 히잡을 벗고 영접기도를 받는데 선교사 다섯 명이 두 시간 반이 되도 영접기도를 다 못 시켜서 한꺼번에 시켰다”고 했다.

이어 “마을 촌장은 저에게 여기가 위험한데 목숨 걸고 또 들어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저는 부르면 오겠다고 약속하고 라마단 기간이 끝날 때마다 3년을 들어갔다. 그 지역이 3년 만에 유치원이 생기고 학교가 생기고 교회가 생기고 매 주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듣는 하나님의 마을이 되어버렸다. 제가 집회를 잘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끝까지 찾으시는 분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런 증거가 쌓이면서 제 몸에 가시가 쌓이기 시작했다. 저는 혈액암 후유증으로 지금도 약을 하루 30알 넘게 먹는다. 심부증 환자로 심장마비도 6번 겪었고, 혈소판이 낮아서 면역력이 떨어지면 생살이 썩어 들어간다. 오른쪽 귀가 녹아내려서 들리지 않고 오른쪽 눈도 실명했다. 지금도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한 시간도 견디지 못할 만큼 통증 때문에 힘들고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도 없는 사람이다. 약으로 하루하루 버티지만 오늘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이어 “주님께서 네가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 네 몸에 가시를 두나니 그 약함이 강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다 사명을 받았다. 그 사명은 소명으로 지켜지는데 우리의 약함을 하나님께서 강함으로 만들어주셔서 우리가 거뜬히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줄 믿는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는 고백이 그들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서 했던 고백이고 앞으로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드려질 고백인 줄 믿고 이 시간에 그 고백을 드리기 원한다”며 ‘이제 내가 살아도’를 찬양했다.

고 선교사는 “2015년 5월 31일, 집회를 가던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핸들을 놓쳐서 6중 추돌사고가 났다. 차는 폐차 지경에 몸이 다 부서져서 병원에 누워 있는데 새벽 3시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잠에서 깼다. 그때 하나님께 제가 무지해서 그러니 잘못한 게 있다면 기억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께선 제가 항상 부르던 노래 가사, 윤복희 권사의 ‘여러분’이라는 곡을 기억나게 하셨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너의 형제가 되어 줄게, 내가 너의 눈물이 되어 줄게, 내가 너의 등불이 되어주겠다고 하시면서 마지막에 내가 너의 피할 길을 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어 “모든 사람이 고석환 선교사는 이제 끝났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다시 세우셨고 꿈에 그리던 남미사역까지 허락해주셨다. 지금까지 이렇게 사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주셨다. 혹자는 저에게 사역을 하는데 왜 이렇게 몸이 아프고 힘든 일이 많냐고 말한다. 십자가의 길은 좁고 협착해서 가는 이가 적고 고난이 따르는데 그 고난은 다시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 고난에 참여하는 자만이 주님과 그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줄 믿는다”고 했다.

고 선교사는 “제 마지막 소원은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제 인생의 소원이다. 또 하나 소원이 있다면 백발이 다 되도록 그의 거룩하심을 증거하고 싶다고 말했던 다윗의 고백처럼 저 또한 마음의 소원이 있다. 주를 바라보지 못한 자들이 주님을 바라봤으면 하는 것이 제 마음의 소원이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 살아계심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상으로 받는 자,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을 소망하는 자들의 기도만이 그 꿈을 이뤄낼 수 있는 줄 믿는다”고 했다.

그는 “욥기서 마지막에 욥이 내가 평생에 주의 말씀을 귀로 들었사오나 이제 눈을 들어 주를 본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만의 고백이 아니라 주를 모르는 자들, 주를 바라보지 않는 자들, 귀로만 듣는 자들이 주를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열심히 달려가길 바란다. 우리는 삶이 힘들면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닫고 주님의 음성을 듣던 귀도 닫고 주님을 찬양하던 입을 닫을 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눈과 귀와 입을 한 번도 닫으신 적이 없다. 우리의 작은 신음을 들으시는 그 하나님을 이제는 우리가 바라보고 달려가면 좋겠다”며 마지막 곡으로 ‘주만 바라볼찌라’를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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