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왜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좋은 분이라면 비극이나 자연재해, 비참한 가난, 허약한 지병, 전쟁 등 의미 없는 죽음을 허락하시겠는가?’ 또한 ‘왜 하나님은 착한 사람들이 고통 받게 하시는가?’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개인적인 고난의 시기에 용기를 얻기 위해 욥기를 찾습니다.

욥기는 아무 잘못 없지만 고난을 받는 것에 대한 결백함과 그가 겪은 끔찍한 손실에 대해 말하며 시작합니다. 욥은 아이들과 재산 그리고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이어서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욥의 고난의 이유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세 명의 친구는 동일한 기본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잘못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이 고난을 끝내기 위해서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며 잘못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불평합니다. 그의 불평은 고통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고통 받는 이유에 대해 하나님이 설명하기를 거부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그의 정당함과 전능자께서 대답해주시기를 호소하며 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욥 31:25).

전체 토론 가운데 마지막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며 질문에 답할 것을 욥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욥은 자연의 섭리에 대한 긴 질문들에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전능하신 주님 앞에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유한한 사람인 욥은 전 우주의 창조주께 답을 요구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욥은 자신의 무모한 질문을 버리고 회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상식을 포함해 많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자주 하나님께 항변을 합니다. 더 나아가 내 생각과 내 의지가 하나님의 계획보다 더 옳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만왕의 왕이신 전능자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 지혜보다 결코 나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진실이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진 분노나 불만을 다루지 못하실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솔직함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대신해 직접 짊어지셨습니다. 의로운 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받지 않아도 될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셨기에 의롭지 않은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질문에 답하시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통해 변함없이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를 채우십니다.

욥기는 예배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욥을 통해 우리가 왜 그런 상황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반응하는 바른 방법이 예배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욥은 하나님의 신실한 예배자로 시작했고 의로운 삶을 살았으며 가족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고난이 시작된 후 욥은 이를 정중하게 받아들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좋은 것만 받아야 하고 나쁜 것은 어떠한 것도 받을 수 없는가?’라고 말했음을 기억해야합니다(욥 2:10)

한편 욥은 그의 친구들과 논쟁하기 시작하자 상당히 조급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성숙해진 욥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창조주의 놀라우신 위엄 앞에 잠잠했음을 보게 됩니다. 욥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진실한 예배란 습관이나 전통 또는 정답을 꼭 얻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시선이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몇 가지 예배의 통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셨으므로 우리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무엇보다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둘째,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0-21)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르게 아는 본질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은 어떤 분이시며, 왜 우리가 예배해야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질문과 답이 우선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예배의 기초이며 여기서부터 참된 예배가 시작됩니다.

셋째, 우리를 위협하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예배의 시작이 됩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욥 33:29-30).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1940년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고통과 고난은 ‘인류가 에덴동산을 나온 이후부터 계속된 문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첫 날부터 반복해서 ‘왜 우리가 고난을 견뎌야만 하는지’를 질문해왔다고 알려줍니다.

욥기는 고난이 우리의 잘못이나 행동을 벌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지에 대한 끝없는 질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듭니다. 비록 비난할 것이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악을 피한 욥이었지만 갑작스럽게도 당한 끔찍한 고난과 고통으로 괴로워합니다. 욥은 고통당해야 하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여러 어두운 날을 힘겨워하며 하나님의 성품과 고통의 원인에 대해 친구들과 논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욥의 생각은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신은 그분이 잘해주셔서 예배하나요?”

욥은 정의롭고 완전히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욥기 1:1). 또한 욥의 행동 습관 의로웠으며, 매일 하나님을 예배했고 그의 대가족에게 제사장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5)

욥은 신실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예배의 삶은 그가 힘든 시련을 겪을 때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시각은 여전히 제한적이었고 하나님을 자신과 동일선상에 두고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움을 의심했습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기억할 때,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영원한 미래의 소망을 얻게 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예배자는 비록 지금 고통가운데 있더라도 언젠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많은 부분 예식적인 면을 중요하게 생각할지라도,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영광 돌리는데 있습니다. 욥은 이 사실에 대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욥기 42:5).

욥기는 예배에 대한 개념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생각을 새롭게 재정립해줍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르쳐주는데 우리가 위기와 고난, 의심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방법에 대해 단지 일부분만을 알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요구들을 허락하실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욥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놀랍도록 위엄 있으시고, 능력 많으시며 지혜 있으신 전능하신 분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유진 피터슨(Eugene Hoiland Peterson, 1932–2018)은 그의 ‘메시지 성경(The Massage)’에서 욥기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고통의 가장 큰 신비는 아마도 어떻게 그 고통이 한 사람을 놀라움과 사랑, 찬양으로 가득한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오게 하느냐이다. 고통이 틀림없이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고통의 시간이 언제나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그런 상황은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몰아갑니다. 우리는 어떠한 비극적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선택하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밀쳐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이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달아나게 할 것인지, 그에게 달려가게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심할 것은 그 선택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쫒아갈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닫을지 결정은 우리의 몫입니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욥은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욥 29:4)라고 추억합니다. 욥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로 지내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욥이 모든 것을 빼앗긴 뒤에도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알았다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그처럼 잘 살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욥 29:4, 새번역) 욥이 비극의 가운데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라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금 쌓아가는 것입니다. 시련에 둘러싸일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습니다. 관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분주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잊지 말고 매일 매순간 동행하는 방법을 찾아야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항상 예배하고 교제하며,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말해줍니다.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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