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의 종말론

예장 합동총신 직전총회장 최철호 목사
예장 합동총신 직전총회장 최철호 목사 ©합동총신

서남동의 묵시론적 종말론을 보면 이렇다. 예수는 ‘민중의 소리’를 외친 자, 그 왕국의 도래를 위해 십자가를 진 자이다. 신국(神國,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에 대한 민중의 기다림은 ‘예수의 재림’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이 원시교단의 본래적인 신앙 곧 기다림이며 또 교단의 출현이다. 유대교의 종말 신앙은 두 개의 흐름인 신국과 천년왕국의 합류이며, 전자는 궁극적 종말, 후자는 준궁극적 종말이다. 그리고 6천년의 전 역시 기간 중 마지막 1천년이 천년왕국이다. 또한 천년왕국은 곧 메시아 왕국이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의 재림이 늦어지자 기다리는 신앙의 자리에 “제도적・행정적인 종교특수화한 교단”이 들어서게 되었고, 헬라적 콘스탄틴적 기독교, 황제의 종교, 공적 종교, 호국 종교, 누르는 자, 부자의 종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체계를 완성시킨 사람은 어거스틴(354-430)이라고 본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오히려 16세기 독일의 뮌쩌가 전개한 급진적 사회개혁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 뮌쩌는 성령의 현재의 직접적 계시가 과거 계시의 기록에 불과한 성서의 문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보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불철저한 “행정적 종교개혁”, “법과 질서를 표방하고 가난한 자, 눌린 자, 암하레쯔의 권익을 관권으로 억압하도록” 한 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고작해서 “군후君侯의 종교로부터 부르조아의 종교”가 되었다고 본다. 이런 선상에서 서남동은 몰트만의 정치신학적 종말론을 선호하고, 마르크스주의에 호의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을 풍미하는 혁명・정치・해방의 신학은 또 마르크시스트, 특히 신마르크시스트의 도전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한다.” 서남동의 이러한 종말론은 참으로 이해불가하다.

8. 한恨의 사제론司祭論

서남동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과 한민족 5천년사에 있었던 숱한 역사적 사건들을 연결시킨다. 그는 고구려 봉상왕 시대 국상 창조리의 혁명을 비롯하여, 궁예와 견훤, 고려의 묘청, 삼별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활동, 홍경래 난, 동학혁명, 독립협회 활동, 3.1운동 및 4.19혁명 등을 민중운동의 전통으로 인식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전통과 병행시킨다. 그러면서 그는 국토 분단의 상황을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분단되어 있다는 허위의식”이라고 매도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볼 줄 모르는 교회 지도자들, 정치・경제의 제도적 모순과 상관이 없는 관념론적 신학, 기업과 경영능력으로 변질된 교회 확장, 반공의 보루 속에 숨어 잠든 교회, 모든 사회적 부의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직 교회의 존속을 염려하여 말 못하는 교권”이라고 질타한다. 따라서 그는 목회자들을 향하여 “저들의 가슴 속에 쌓이고 쌓인 한을 풀어주고 위로하는 ‘한恨의 사제’가 될 것을 촉구한다.

서남동이 한민족의 불행한 역사적 사건을 ‘민중’이라는 도그마를 설정하고 그것을 믿음의 선진들의 행보와 병행시킨 것은 무척이나 생소하고 어설프다. 대륙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땅의 한민족은 숱한 외침外侵과 더불어 인류 전체가 함께 겪어 온 사회구조의 모순 가운데 쌓인 한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과 목회의 초점을 거기에 맞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신앙의 본질에서 곁길로 벗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우는 자를 위로해야 하지만, 그러나 한을 풀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다.

결론

민중신학의 범주를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으로 보면서 이들을 모두 총괄하여 정치신학으로 보는 그의 신학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된 자, 눈먼 자인 ‘민중’의 하나님일 뿐이다. 성서는 의사결정을 위한 하나의 참고서이다.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나사렛 출신의 해방자 인간 예수이다(그에게 신성은 없다).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정치적인 상징에 불과하며, 민중이 주체가 되는 세상이 곧 부활이다. 메시아 왕국은 마지막 1천 년이며, 그 주체는 예수가 아니라 민중이다. 종말은 상징이다. 교회는 예배당이나 목회자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부자는 결코 천당에 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남동은 “교회는 믿음으로 산다”라고 말한다. “교회의 존재는 주의 말씀에 대한 복종에 있다. … 교회는 다만 신앙심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결단을 할 때, 거기 있는 것이다.”

나는 신학과 신앙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무신론자도 ‘하느님’과 ‘성서’를 연구하는 신학자神學者가 될 수 있다. 이성과 영성은 다르다. 하나님을 참되게 인식하고(knowing) 지각(feeling)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영성이다. 영성은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는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는 말씀은, 곧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에 관련된 것―삼위일체, 성경, 성육신, 구원, 부활, 하나님의 나라 등―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지식으로 성서를 만나는 사람은 인문사회학적으로밖에 깨달을 수 없다. 나는 의문한다. 서남동은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끝)

최철호 목사(예장 합동총신 직전총회장, 한교연 다음세대를위한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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