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윤 박사
강지윤 박사

조금씩 주춤하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피어올라 감염된 인원이 백 명을 또다시 넘겼다고 한다. 일상이 정지된 듯 모든 것들로 부터의 ‘거리두기’가 미덕이 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외로움을 느끼던 사람들은 더욱 크게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바이러스의 위협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하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유명한 카페에 가보면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크고 넓은 카페에는 신나는 음악이 깔려있고 사람들은 서로의 소통을 방해하는 마스크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마주 앉은 사람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치 여기는 청정지역이니 마스크 따위 안 써도 된다, 거리두기 안 해도 된다, 라고 선언하듯이 아무도 코로나 따위를 의식하지 않는 듯 하다.

교회의 소모임을 금지하던 때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억울해 했던가. 카페나 음식점에서는 마스크도 없이 바글바글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교회에선 철저히 마스크를 쓴다. 그런데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뉴스가 나오면 마치 교회에서 걸린 것처럼 혐오감을 가지고 본다.

나도 글을 쓸 때면 카페를 찾는다. 답답해도 꼭 마스크를 쓰고 커피를 마실 때만 잠깐 마스크를 벗었다 다시 금방 마스크를 올린다. 혹시나 내가 이 카페에서 코로나에 걸리게 되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민폐가 되겠는가. 그러고보니 카페에서 마스크 쓴 사람이 나 뿐이다.

코로나에 걸렸다 극적으로 치료된 사람들이 말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한 달이었다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고 가슴 통증은 극에 달하고 항생제 주사를 계속 맞고 밥도 못먹었다고. 이러다 죽을 것만 같았다고.

바이러스의 창궐은 우리를 강제로 거리 두게 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거리에서도 마스크 쓰지 않은 사람이 없고, 어떤 이들은 마스크를 쓰니 내 얼굴을 노출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다고도 했다.

상담실 풍경도 달라졌다. 어쩔 수 없이 상담자 내담자는 마스크를 쓴 채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말해야 하게 되었다. 심리상담에서 면대면은 매우 중요하다. 얼굴과 얼굴에서 나타나는 비언어적인 모든 것들이 치유를 위한 자원이 되는데, 지금은 눈빛과 눈의 표정만으로 아픔을 읽어야 한다.

익숙한 모든 것들과의 ‘거리두기’는 한동안 이어질 듯하다. 코로나 약이 개발되어도 우리는 바이러스의 위협에 길들여져 여전히 마스크를 쓰게 될 것이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시작된 낯선 세상에서의 경험이 더 큰 외로움과 단절감으로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 혼자된 느낌이 싫어서 우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고 또 찾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해도 여전히 혼자라는 느낌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내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정말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단 하루를 살아도 ‘의미’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내인생에 켜켜이 녹아있는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또다시 재현되는 건 아닐까? 그 고통스러운 경험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그 시간으로 퇴행하면 어떡하나?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혹은 혼자 있어도, 늘 외롭던 그 극단적인 감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몸부림치는 사람들 속에서 소통과 공감 그리고 경청 같은 고귀한 인간자질마저 거리두기 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타인과의 거리두기가 나 자신과의 소통과 나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가장 미워하고 내가 나를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채 하며 직면하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 돌아보길 바란다. 자기자신과의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지고나서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해 보면 훨씬 부드러워진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타인이 규정지어준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 인식한 자기자신과 대면해 보기 바란다. 타인이 나를 안 좋은 사람으로 규정지었다고 해서 본연의 내가 그렇다고 믿어버리지 말길 바란다. ‘나’는 ‘나’다. 나 외에는 누구도 나를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타인은 나의 극히 일부분만 알 뿐이다. 가족이나 친구 조차도.

누군가 내 외로움이나 고통을 다 알아주길 바라지만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내가 나의 위로자가 되고 나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거리두기의 시간 동안 내가 나를 토닥여주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영적인 존재인 사람이 모든 것으로 부터의 고요한 ‘거리두기’의 시간 속에서 신과의 관계를 가까이 한다면 그 또한 가장 좋은 성장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신과 더욱 가까이, 나와 더욱 가까이, 그리하여 ‘거리두기의 타임’이 퇴행이 아니라 자신을 조금씩 ‘성장시키는 축복의 시간’이 되게 할 것이다. 좀 더 자유로워진 자아와 만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 뼘 쯤 더 행복해진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강지윤(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 심리상담학 박사)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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