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감리교신학대학교 정문 현판. ©자료사진=기독일보

21세기의 지난 세기의 낡은 이념처럼 들리는 토착화(indigenization) 신학을 되새겨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토착화 신학은 한국인의 주체적 신학을 주창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 그대로 복음이라는 간단하고 순진한 인식으로 한국사회 복음화를 위해 기독교인들이 달려 나갈 때, 토착화 신학자들은 그런 방식으로는 민족을 얻는 것은 물론 복음의 본래적 내용들이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오늘날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한국에서 매우 힘 있고 명망 있는 종교라서, 선거 때마다 정당을 만들어 원내 진출을 목표로 힘쓸 수 있는 상황이라지만, 이미 개신교는 다른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무종교인들로부터도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왜 그런가?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를 보았던 인식, 즉 이곳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미개하고 낙후된 지역이고 이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곧 ‘근대화’(혹은 현대화)라는 인식을 21세기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러한 상황 속에서 토착화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복음이 사회를 변혁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려면, 그것은 기존 한국의 문화를 미개하고 유치한 것으로 몰아붙여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 문화의 주체성을 토대로 복음을 한국화 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1세기 대한민국 개신교가 처한 상황, 내부적으로는 결속이 비교적 잘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전혀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가기는커녕 그마나 갖고 있던 영향력마저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토착화 신학의 경고를 떠올린다.

아직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땅의 문화와 사람들이 교리적 우월의식으로 정복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복음의 선교는 우월의식이나 특권의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 소중한 복음을 누가 더 들을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이고, 그를 위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을 오히려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체 의식 즉 한국 문화의 주체 의식으로 서구의 문명과 함께 이 땅에 건너 온 복음의 모습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토착화 신학자들의 경고였다. 이 경고는 21세기 이미 다인종·다민족·다종교 사회로 선포된 대한민국 사회에도 여전히 적절한 경고이다.

‘토착화’란 명칭은 서구의 관점에서 복음이 식민지의 환경 속에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토착화’란 용어는 근대 제국과 식민지 간의 이분법적 위계적 정치권력 구조를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 토착화해야 할 곳은 대개 (서구의 눈으로 보기에) 문명이 뒤떨어지는 지역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토착화’라는 용어 자체는 이런 함의 없이 중성적인 말이지만,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나아오는 시점에서 ‘토착화’란 용어가 활발히 사용되는 영역은 정치적으로 중성적인 영역이 결코 아니었다. 이런 전 역사를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영어로 indigenization은 ‘토착화’라기 보다는 오히려 ‘현지화’라고 번역된다. 즉 그 지역의 것이 아닌 것을 현지 실정에 맞게 조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미국 출신의 글로벌 기업 맥도날드가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 실정에 맞게 가격과 메뉴를 조정해서 판매하는 전략 등이 ‘현지화’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토착화’는 전혀 대한민국과 같은 세계정치권력의 주변부 국가들에게 긍정적인 이름으로 들리지 않는다.

한국 신학 내에서 토착화란 ‘상황화’(contextualization)로 이해되곤 했다. 복음이라는 본질 혹은 실체가 그것이 처한 주변상황에 맞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지화’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현지화가 마치 기업의 현지화 판매 전략에 중점을 둔 것처럼 들린다면, 상황화는 보다 문화적 현지화에 초점을 둔 것처럼 여겨진다.

신학적으로 ‘상황 신학’은 복음은 본질적이고 문화는 주변적이라는 도식 자체를 뒤집어 버린 기여가 있다. 즉 본질은,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바로 상황 자체라는 것이다. 본질/상황 간의 위계적 이분법을 분쇄하고, 상황을 주체로 세우는 시도 그것이 바로 상황 신학이었다.

‘토착화 신학’의 몸짓은 바로 이 상황 신학의 몸짓을 거의 그대로 반복한다. 그러나 몸짓은 같아도, 의미와 시도는 다른 맥락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결국 토착화 신학은 한국적 주체의 몸짓으로 신학을 하는 공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해천(海天) 윤성범은 탁사 최병헌과 정경옥의 맥을 이어 한국 신학계에 토착화 신학을 담론화 시킨 인물이다. 특별히 윤성범은 한국 유교와 유교 성리학을 비교분석하면서, 성(誠)의 신학을 주창한 매우 창조적인 신학자였으며, 단군 신화의 ‘환인·환웅·환검’을 기독교 하나님의 삼위일체와 비교분석하면서, 단군신화를 보편적 하나님 개념의 흔적(vestige)라고 보았다.

단군신화에 대한 윤성범의 토착적 해석은 당시 박봉랑, 전경연 등으로부터 매우 강한 신학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기독교의 복음은 문화변혁적인 것이지,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고 보았다. 단군신화의 삼신을 삼위일체 기독교 하나님의 개념적 흔적으로 파악한 것은 곧 기독교적 요소는 모든 문화에 “선험적”(a priori)인 어떤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화에서든지 흔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후대 신학자들은 기독교 복음의 이 문화적 선험성을 여전히 기독교 우월주의의 논조로 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적으로는 식민지 시절을 지나갔지만 정신적·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식민지적 열등의식이 문화적으로 팽배하던 시절, 우리 문화에 바탕하여 주체적으로 서구의 수입된 기독교의 복음을 분별해 나아가야 한다는 토착화 신학자들의 대담한 주장들은 여전히 귀담을 들을 만하다.

오늘날 우리 신학계는 ‘탈-식민지주의’(post-colonialism)라든가 복음의 자기화(self-theologizing)라는 개념을 듣는다. 특별히 인도 사람들이 영국 지배 하의 식민지적 경험과 근성을 극복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탈식민지주의는 전 세계 지성을 울리는 소크라테스의 날파리 역할을 충실히 잘 감당하고 있다.

바로 이 탈식민지적 정신이 토착화 신학이 주창한 정신이다. 선교 영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자신학화’(self-theologizing)라는 개념이 유포되고 있었다. 전해진 복음이 뿌리를 내리려면 현지의 지도자들이 주체적 시각에서 신학을 전개하고 장려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흐름과 선교적 흐름들은 모두 ‘토착화 신학’의 몸짓, 즉 서구에서 수입된 신학을 신학 그 자체로 보기 보다는 한국인의 문화적 주체성으로 서구화된 복음의 본질을 분별해 내려는 시도가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음을 반증한다.

오늘 우리는 지구촌 자본주의 현실 하에서 한국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신학하고 있는가? 오늘날 21세기 ‘토착화 신학’이나 ‘민중 신학’같은 자생철학의 뿌리가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 우선 한국 신학의 담론들이 학문적으로 지난 20년에 걸쳐 발전해 오는 속도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기존 제도권 신학자들의 학문적 게으름이 일차적 원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뿌리의 약화를 온전히 다 설명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대학을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이제 ‘생존경쟁’과 ‘무한경쟁’을 대학들에 도입하는 시대적 환경이 학문에 대한 관심과 발전을 급속히 쇠퇴시키고 있다. 학문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연구업적 평가기준들이 세분화되고 발달해 가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외적인 업적의 숫자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시절이 시작된 이래로 신학의 학문적 쇠퇴는 가속화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라는 자연현상을 빌미로 도착된 권력구조를 대학가에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토착화 신학의 시대로 되돌아간다. 바로 그 과거에서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한국 신학의 미래를 듣고자 한다. 미래는 그저 주어지거나 혹은 아무런 연고 없이 하늘에서 내려와 계시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미래는 오늘이라는 현재에서 과거와 상호작용하며 우리가 어떤 몸짓을 그리느냐에 따라 구성되는 역사적 산물이다. 오늘 우리의 몸짓은 결코 낡은 과거를 추억하며 감성에 젖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이나 집단은 결코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아주 단순 소박한 진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 로비에서 윤성범을 중심으로 한 한국 토착화 신학자들의 저서와 사진, 유품 전시회를 진행하고, 5월 24일 웨슬리회심을 기념하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변혁을 위한 한국적 토착화 예배를 드린다. 또한 원로 신학자(유동식, 김광식, 김경재)를 모셔 강연회를 개최한다. 두 번째 날인 25일에는 윤성범을 기리는 70~80년대 학번 동문들이 신학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 : 토착화신학의 기억(Memory)과 꿈(Vision)

일시 : 웨슬리회심 기념주간 [5월 24일(화) ~ 25일(수), 2일 행사]

5월 24일(화)

11시 : 오픈기도회 및 전시회

13시 : 채플

14시~16시50분 : 원로 스승(유동식, 김광식, 김경재) 강연

5월 25일(수)

13시~16시30분 : 70~80년대 학번 중심의 신학이야기

장소 : 오픈기도회 및 전시회 -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 내 로비

예배 - 웨슬리 채플

학술잔치 - 중강당

※ 윤성범 약력 :

해천 윤성범 전 학장
해천 윤성범 전 학장.

호 해천(海天). 경상북도 울진 출생. 1934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를 나와, 1941년 일본에 유학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學校] 신학부를 졸업하고 1945년에 목사가 되었다. 8·15광복 후인 1946년 감리교신학교 교수가 되어 6·25전쟁을 겪고 나서, 1953년 스위스 제네바의 에큐메니칼학원을 거쳐, 1954년 바젤대학교에 입학, K.바르트에게서 사사하고, 1960년 졸업과 동시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국제종교사학회 실행위원에 피선되었다. 귀국 후, 신학의 토착화(土着化) 내지 한국적 신학을 주창하며 바르트의 제자답게, 삼위일체론적·존재론적인 신학방법론을 구사하였다.

1963년에는 단군신화 논쟁을, 1973년에는 유교의 진리체계와 접목시킨, 이른바 '성(誠)의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등, 그리스도교와 한국사상과의 만남을 통하여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국내 유교·불교 학자들과도 폭넓은 교유를 가지며 국제 종교사회학에서도 적극적인 활약을 하여 한국 신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많은 오해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한 이후 한국적 신학의 정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저서에 《기독교와 한국사상》 《한국적 신학》 《효(孝)》 등이 있다.

/감신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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