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정성구 박사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다’(E.H. Carr)라고 했다. 성경은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1:10)’고 했다. 지금 세계는 ‘단종’ 앓이를 하고 있다. 570년 전 조선의 애달픈 사연과 사건이, 동서양의 관객들을 눈물짓게 하고 있다.

옛날에도 이런 비극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런 비극이 있다. 그러니 어느 민족, 어느 국가, 어는 사회든 권력 투쟁이 있었고, 왕권을 거머쥐기 위해 혈육을 척살했던 사례는 동서고금에 수도 없이 많았다. 권력과 명예를 탐하고 돈을 사랑하고, 환락과 쾌락을 좋아하는 인간의 심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하기야 성경에 인류의 조상 아담의 두 아들 사이에도 질투로, 형이 동생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신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않은 것에 대한 앙심을 품은 가인은 백주에 동생을 둔기로 쳐 죽이는 인간의 잔인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가인’도 많고, ‘아벨’도 많다.

세계는 인간 창조 이래 약 6,000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모두 하나같이 명분은 그럴듯해도 우리 모두는 죄로 죽어있는 자들이기에 인간의 잔인성과 욕망은 타고났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은 다 거짓되었고,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죄로 어두워져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매우 특별한 방법을 구상했다. 이른바 ‘대속(代贖)’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방법을 만드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즉 인간의 자력 구원(救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의 절대적인 공로로 이루어진 구원이다.

하기는 이 진리를 누가 믿겠는가? 40여 년 전 개신교, 가톨릭, 불교 3개 대학 총장들이 국방부 군종실 주최로 세미나를 연 적이 있었다. 첫 번째 강사로 내가 했고, 다음은 동국대 총장인 이기영 박사였다. 그는 벨기에 루방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으로 한국 철학계의 거두였다. 그는 내 강연 뒤에 올라와서 말하기를, “나는 은혜니, 은총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공짜가 말이 되느냐! 인간은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보상을 받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자력구원(自力救援)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속죄의 복음,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마음으로 믿는 종교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대로 믿는 자에게는 하늘의 평강, 기쁨,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에 평생 진력했다.

‘왕과 사는 남자’가 전국을 울리고, 미국을 울리고, 유럽을 울리고 호주와 아시아를 울렸다. 왜 그랬을까? 외국인들은 우리말도 모르고, 우리의 역사도 잘 모르고, 얼마간의 통변하는 자국어가 있을 뿐인데 그들은 왜 울고 또 울었을까? 결국 모든 인간의 감성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밑바닥에는 권력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것이 전쟁의 방법이든, 쿠데타의 방법이든 간에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패거리들만이 정의이고, 왕위를 위태롭게 하는 모든 것은 ‘범죄’요, ‘반역’이요, ‘역도’요 ‘내란 세력’이었다.

세조는 왕이 되기 위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청령포로 귀양을 보내어 쓸쓸한 죽음을 맞게 한다. 17세의 소년 상왕이 눈에 거슬려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단종을 지키고 복위시키려는 세력들을 내란으로 몰아, 인간의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문을 주었고, ‘성삼문’을 비롯한 여섯 충신을 벌거벗긴 채로 처형했다. 채찍으로 쳐서 피가 낭자하게 만들고 벌겋게 달군 인두로 몸 전체를 지지며 태워 죽였다. 그러니 권력에 대한 잔인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육신은 신하의 도리를 지키려고 사지가 찍혀 나가고 살점이 떨어지고 혀가 뽑혀 죽어갔다.

그런데 청중들은 왜 울었을까? 단종에 대한 애달픈 동정심도 있겠지만,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 자신의 내면을 보았을 것이다. 역사는 궁극적 심판이 있다. 불의한 방법으로 부당한 악심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유배까지 보내고 죽게 만든 세조가 승리한 것이 아니고, 그도 육적으로, 영적으로 망가진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권력 찬탈은 지금 당장 승리한 것 같아도 결국은 백성들의 심판이 있고, 백성들의 심판이 없어도 역사의 심판이 있다. 또 역사의 심판이 없어도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다는 나팔 소리와 같은 영화였던 것이다. 비록 청령포의 오지에서 고독과 싸우며 끝까지 어린 왕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참다운 백성 사랑과 정신(愛民思想)에 보는 이로 하여금 왈칵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단종을 거둔 ‘엄흥도’라는 한 남자의 용기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냈다.

아직도 동서양 사람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고 타락한 심성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영혼 깊은 곳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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