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1절에서 갑작스럽게 화살의 방향을 바꾼다. 앞선 1장에서 이방 세계의 타락과 죄악을 날카롭게 고발하던 바울은 이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부르며, 유대인 곧 스스로 의롭다 여겼던 자들을 정면으로 겨눈다. 죄의 문제는 언제나 ‘저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가장 위험한 자리에 서게 된다. 바울은 판단하는 그 행위 자체가 곧 자기 정죄가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판단하는 자 역시 같은 죄의 구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사실에 깊이 기대어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했고,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졌으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지점이 함정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지식이 회개의 자리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특권 의식이 된다. 남을 정죄하는 언어 뒤에는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영적 교만이 숨어 있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이 진리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감사 기도를 드렸지만, 그 감사의 내용은 자기 의에 대한 만족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그에게는 변명도, 비교도 없었다. 오직 자비에 대한 간구만이 있었다. 예수는 바로 그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선언하신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감정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된다”는 말은, 외형이나 종교적 위치가 아니라 실제 삶과 마음의 진실이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예외는 없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신다. 남을 판단하면서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오히려 더 분명한 빛 아래 서 있는 셈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날카롭게 다가온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옳고 그름을 분별할 언어는 늘어나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줄어들기 쉽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심판자의 자리에 세우지 않는다. 복음은 늘 세리의 자리에 서게 한다. 내가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나의 경건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로마서 2장은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 손가락이 결국 나 자신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진정 성숙해진다는 것은, 스스로 설 수 있다고 믿는 지점에서 벗어나 다시 은혜에 기대어 서는 것이다. 판단을 내려놓고 자비를 구하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복음은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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