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애 박사
이경애 원장

의사소통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 간에 소통의 부재나 왜곡으로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을 생각하면 서로의 진심이 통하는 의사소통 기술이야말로 어떤 심리 사회적 기술보다 중요한 덕목이 될 것이다. 소통(疏通)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막힘이 없이 통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즉, 내가 전달하고 싶은 뜻이나 생각이 막히지 않고 그대로 전달되는 것, 이것이 바로 소통이 잘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 그 원인을 생각할 때면 대개 나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은 것 때문에 속상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의 잘못된 소통 방식을 인정하기 전에 방어적인 자세로 자신의 의도가 전달이 안 되었다는 변명을 일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어’ ‘내가 말을 잘 못하잖아’ ‘내 어투가 그래서 그렇지 나 속마음은 그게 아니야’ 식의 태도로 불통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불통에 대한 변명으로 시작한 해명이, 상대방에게 수용되지 않는 경우 분노로 변질되어 결국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도 보게 된다.

과연 건강한 소통이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의사소통 방식에 대해 많은 상담가들이 이야기해 왔지만, 그중에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가족 간 대화를 이야기한 버지니아 사티어(V. Satir)의 대화방식은 진정한 소통을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녀는 건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내 메시지를 들을 상대방과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맥락, 이 세 요소가 모두 고려되어 일치할 때 서로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대화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화자(話者)인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하고, 그 내용을 들을 청자(廳者)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으며, 그 소통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한 조화로운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질 때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모두 자존감이 높아지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거나(비난형) 반대로 자신의 입장은 무시하고 상대방의 비위만 맞추는 대화를 한다면(회유형), 그것은 불일치의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과 타인의 입장을 무시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상황만 주시하는 대화를 하거나(초이성형), 심지어 자신과 타인과 맥락조차 고려하지 않는 무질서한 대화를 하려 한다면(산만형), 그러한 대화방식은 자존감을 높이는 대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 요소가 의사소통에서 모두 충분히 고려될 때 건강한 일치형의 대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4 복음서를 읽을 때 각각의 복음서에 공통된 내용이 포함된 경우를 본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 사건이라든가 (신학자들의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 등은 모두 공통된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와 달리 4복음서는 각각 독특한 특징을 갖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 문체나 내용이나 속도감 등의 결의 차이는 누구를 향한 글인가 하는 청자에 따른 차이 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향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통치자,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복음서이고,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향해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기 위한 복음서이며, 누가복음은 헬라인들을 향해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기 위한 복음서이고, 요한복음은 모든 이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복음서라는 것이다. 즉, 듣는 이가 명확했기 때문에, 말하는 이도 명료한 의도를 갖고 명쾌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고, 그 상황과 맥락에 일치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 성서는 매 순간 읽는 우리에게 성찰하고 돌이켜 회개하도록 이끄는 명료하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누군가와 갈등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나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아 속상해하고 있다면, 심지어 나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 때문에 분노하고 있다면, 나는 과연 듣는 이를 고려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도록 하자. 내 진심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메시지도 분명해야 하고, 상대방을 향한 배려하는 진심도, 그리고 그 둘이 놓인 상황도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고집스런 생각의 틀을 벗어나, 배려하고 고려하려는 확장된 태도, 통하는 대화를 위한 윤리적 태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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