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제프 파운틴 작가의 기고글인 ‘역사는 귀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에게, 파시즘으로 향하는 신앙의 위험한 경사로를 드러내 보여준다’(History reveals the slippery slope to fascism for Christians with ears to hear)를 최근 게재했다.
제프 파운틴 작가는 슈만 유럽 연구 센터(Schuman Centre for European Studies)의 창립자이며 1990년부터 YWAM 유럽의 이사로 재직하며,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변화된 정치 환경에서 활동해왔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우리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날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기 어려운 때가 많다. 예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오늘날 미국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기독교적 가치와 평화를 수호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증오와 분열을 설교하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의 등장은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국경을 넘어 세상을 흔들고 있다. 자기확대와 사리사욕, 보복심, 그리고 진리·인권·법치·양심과 언론의 자유를 무시하는 그들의 언행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이럴 때, 1930년대 독일 교회의 경험을 돌아보는 일은 매우 엄숙하면서도 교훈적이다. 혼란과 혼돈의 시대에 “안정, 존엄, 질서”를 약속한 한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을 때, 독일인들은 무엇을 선택했는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르사유 조약이 안겨준 굴욕, 경제 대공황과 초인플레이션의 고통, 바이마르 공화국의 도덕적·사회적 혼란,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공포가 뒤섞이며 독일인들은 “나라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외치는 한 구세주를 열렬히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33년, 그들은 자신들이 독재를 축복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혼란으로부터 신앙과 가정, 조국을 지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의 언어는 거의 성경적이었다 — “하나님의 섭리,” “도덕의 회복,” “긍정적 기독교,” “독일의 영혼을 무신론과 타락으로부터 지키겠다.”
당시 동쪽에서는 군사적 무신론과 혁명적 사회주의가 위협으로 다가왔다. 많은 이들에게 볼셰비즘은 “적그리스도”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를 재건하고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이 강력한 지도자를 환영했다. 나치즘은 기독교 문명을 지키는 도덕적 방벽으로 포장되었다.
1930년대 초, 사람들은 희망과 열정으로 들떴다. 1932년, 루터교회 내 친나치 성향의 신자들은 스스로를 “도이체 크리스텐(Deutsche Christen)”, 즉 ‘독일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이 지도자를 “하나님이 보낸 자”라고까지 칭송했다. 구약성경을 “유대적”이라며 배척하고, “아리안 예수”라는 인종주의적 신앙을 내세우며 “가슴엔 나치 문장, 마음엔 십자가”를 구호로 외쳤다.
이들은 1933–34년 사이 교회 상당수를 장악했다. 공포와 협박이 많은 목회자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나치 이념은 인종을 세례 주었고, “피와 땅(Blut und Boden)”이 신앙의 교리로 둔갑했다.
1933년 1월, 그 지도자는 총리가 되었다. 두 달 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그 사건을 빌미로 독재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바티칸과 협약(콘코르다트)을 체결하자 개신교 지도자들은 “정권이 여전히 기독교를 지지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같은 해 9월, 독일 복음주의(루터)교회는 공식적으로 나치 체제에 편입되었고, 충성스러운 루트비히 뮐러가 ‘제국주교(Reichsbischof)’로 임명되었다. 교회들은 감사예배를 열어 새 시대를 찬양했다. 그러나 소수의 인물들인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지도자’를 교회의 머리로 둘 수 없다”고 경고했다.
1934–36년, 교회는 분열과 부정의 시기를 맞았다. 바르트는 국가 통제를 거부한 목회자들과 함께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을 초안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외의 어떤 주권도 인정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이 선언으로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가 형성되었다.
1935년, 뮐러가 이끄는 제국교회는 혼란 속에 붕괴했다. 히틀러는 교회 정치에 염증을 느꼈다. 바르트가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하자, 그는 본 대학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스위스로 추방되었다. 마르틴 니묄러는 ‘목회자 긴급동맹’을 조직해 교회의 자율성을 지키려 했다.
이후 종교통제부가 신설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이 정권이 기독교적이 아니라 이교적이며 인종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고백교회가 인종이데올로기와 신앙의 자유 침해에 항의하자, 게슈타포가 급습하고 신학교들이 폐쇄되었다.
이때 본회퍼는 핀켄발데에서 지하 신학교를 열어 “값비싼 제자도”를 가르쳤다. 소수의 신앙인들이 저항을 심화시켰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침묵하거나 순응했다.
1937–38년, 고백교회는 불법화되었다. 박해와 공포가 심화되었고, 니묄러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들이 체포되었다. 1938년 11월 9일, 악명 높은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 일어났다. 유대인의 회당과 상점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전쟁 선포’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보복이 두려워 침묵하거나, 반유대주의 정서에 동조했다. 그때 본회퍼만이 “피해자의 상처를 싸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회는 그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해야 한다”고 외쳤다.
1939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교회는 오히려 군대를 위해 기도하고, 설교단에서 국가에 순종하라(로마서 13장)고 가르쳤다. 유대인 박해가 심화되어도 거의 어떤 저항도 나타나지 않았다. 1941년 ‘최종해결’이 본격화되었을 때, 교회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저항한 이는 1%도 되지 않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침묵과 동조에 대해 깊이 회개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와 기독교를 혼동했음을 고백했다. 이후 독일 교회는 ‘과거청산(Vergangenheitsbewältigung)’, 즉 “과거와의 화해”라는 긴 회개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그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물음인 “혹시 지금 우리가 1933년의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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