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다. 하나는 하늘에 있고, 다른 하나는 이 땅의 국가에 속해 있다. 이 이중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깊은 고민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의 질서를 만드는 국가는, 우리가 소망하는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수많은 시대 속에서 교회는 이 질문에 답하며 때로는 국가와 위험하게 손을 잡았고, 때로는 세상과 등진 채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성경의 빛 아래 이 관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국가는 하나님 나라의 모조품도, 적대자도 아닌, 그것의 도래 이전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독특하고 잠정적인 도구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던지는 통찰은 실로 거대하고 역설적이다. 그는 칼과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저 거대한 로마 제국을 가리키며, 그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이는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신성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 세상의 현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다. 국가는 '칼'을 가졌다. 이 '칼'이라는 상징 속에는 국가의 본질과 한계가 모두 담겨있다. 칼은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마음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악한 행위의 확산을 물리적으로 막고, 선한 행위의 최소한을 보장하여 사회가 완전한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아니라, 세상을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사역이다. 국가는 죄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세상의 둑을 보수하는 임시 방편이지,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하는 청사진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불완전하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칼'의 권세를 용인하시는가. 여기에 디모데전서가 보여주는 교회의 사명이 아름답게 겹쳐진다. 바울은 교회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기도의 열매는 바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이다. 이 평안함은 단순히 개인의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더 큰 그림,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뜻을 위한 것이다. 세속 국가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안정과 질서라는 것은, 마치 폭풍우가 치는 광야 한가운데 쳐진 작은 장막과 같다. 그 장막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지만, 그 안에서 나그네들은 잠시 비바람을 피하며 생명의 양식을 나눌 수 있다. 국가는 바로 그 장막의 역할을 한다. 국가가 유지하는 질서와 안정이라는 토양 위에서, 비로소 교회는 생명의 씨앗인 복음을 자유롭게 뿌릴 수 있는 것이다. 국가는 무심하게 밭을 갈지만, 교회는 그곳에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심는다. 이 오묘한 역할 분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전진한다.
따라서 국가와 하나님 나라는 그 지평 자체가 다르다. 국가의 지평은 이 땅의 정의와 질서에 머물며, 그 시선은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평은 영원을 향해 열려 있으며,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생명을 다룬다. 교회가 이 사실을 망각하고 국가에게 하나님 나라의 역할을 떠넘긴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의 '칼'을 빌려 복음을 강요하려 들고, 국가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신성화하려 한다. 이는 결국 복음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키고, 국가를 우상의 자리에 올려놓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국가를 존중하되, 결코 절대시하지 않는 지혜로운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국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서 유지의 도구임을 인정하고 시민의 의무를 성실히 감당해야 하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교회라는 그리고 복음이라는 귀한 보물을 잠시 담아두는 질그릇과 같다. 질그릇은 언젠가 깨어지기 마련이지만, 그 안에 담긴 보물의 가치는 영원하다. 우리는 그 질그릇의 소중함을 알지만, 그것을 보물 자체와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는 예배와 복음 선포를 위한 고요한 공간을 마련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그 소임을 다할 때 잠시 그 존재의 의미를 빛낼 뿐인 임시적인 존재인 것이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요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