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둘째, 완전한 헌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근본이시며 교회의 반석이시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머리이십니다. 모든 구속을 받은 신자들은 이 그리스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토저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 전체는 그분의 아들의 두 어깨 위에 서 있다”고 외치며 자신은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충분하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따라야 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만이 온전케 되는 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①첫째로 그것은 감상이나 상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어렴풋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던 당시 풋내기 신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상상 속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상상 속의 구원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고 일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 이런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젖먹이 수준의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어지럽혀지고 이런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로 행세하므로 인해 교회가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기피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②둘째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굳센 의지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 충동이나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추종하여 쉽게 결정하고 쉬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슬픔의 골짜기를 관통해야 하는 마음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결코 용이하지 않습니다. 아스팔트길이 아니라 길도 나지 않은 험한 바위산으로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의 길은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의지가 약하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의지는 오래 참고 견디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③세 번째로 토저 목사는 ‘수용적 종속’을 말합니다. 수용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전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살려고 하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오늘 소개한 갈 2:20의 말씀을 보세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육체 안에서는 죽었고 믿음 안에서는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일을 바라고 추구하고 소망할 권리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니 육체의 일에서 미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 3:1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증언하였습니다.

4. 결어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반드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없는 기독교, 십자가의 체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없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실토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거듭남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거주합니다. 오늘 소개한 사도 바울의 진술과 고백을 경청해 보세요.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장 고통이지만 그 뒤에 따르는 완전한 기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라”(6:6~7)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주님의 피 흘리심을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큰사랑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은 자가 혹 있거니와(7),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롬 5:6~8)

사도 요한은 우리를 살리려고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나를 살리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한다는 말입니까?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화의 핵심은 ‘사랑’ 사랑이 없는 신앙은 헛소리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요일 4:7).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십자가의 능력을 입었다면 모든 일을 주님의 사랑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계속)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