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감사하려면?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가 고난에 원망 불평 혹은 기도로만 끝낼 수는 없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새벽기도에 출석하여 뜨겁게 기도하여서 어떻게든 해결되면 또 게을러졌다가 또 다른 고난이 생기면 계속 기도로만 버티는 일을 반복하면서 신앙생활을 마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난이 닥칠수록 성경말씀을 자기 삶에 비추어 파고들며 하나님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지속해야 합니다. 고난이 닥치지 않으면 세상에 나가 즐기기 바빠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고난 중에 정말로 의도하신 뜻이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지 조금씩 깨달아 나가야만 진정한 감사도 가능해집니다.

바울이 자기 죄로 자신이 사망의 몸이 되었다고 한탄한 후에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우선 그는 그런 고난을 감사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랬다고 합니다. 죄로 넘어졌지만 도덕적 양심과 의지로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어떤 흉악한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며 실토하면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을 다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나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도 자기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발버둥친 것이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무시 외면하는 잘못이자 교만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으로는 아직도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덧붙인 것입니다. 그는 죄로 넘어진 것 자체를 감사한 적이 전혀 없고 그로 인해 예수님의 은혜와 십자가 진리를 다시 깨닫고 자기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 것입니다.

바울의 현실적 고통이었던 고질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탄의 가시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면 엄청난 고통이 따랐을 것입니다. 세 번 기도했어도 낫지 않았으니 그 병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끝까지 기도가 응답되지 않자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한마디로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려고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바울이 자기 능력이 연약함을 절감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영적 진리를 깨닫자 자신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는 통로가 되므로 그 연약함을 기뻐하며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정말로 하나님 그분에게 감사해져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바울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일대일의 관계부터 순전히 기뻐하는 관계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 서신이 저작될 당시도 예수 믿는 신자들은 유다 공동체에서 출교 되었고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이 심해졌습니다. 주님이 자기들 세대에 다시 오신다고 했기에 이미 죽은 신자 가족들이 주님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약속은 죽은 자에게도 동일하며 살아 있는 너희는 예수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어있으니 그 진리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범사에 즉, 어떤 고통스런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다고 위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라

다시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지금 바울처럼 노력하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 어떻게 해야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는지 그 성경적 원리만 설명하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당시로는 세계에서 도덕적 영적으로 최고 수준이었고 그래서 자기 생명을 걸고서 스승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비천한 하녀가 추궁하자 비겁하게 겁을 먹고 저주하면서까지 스승을 세 번째로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새벽닭이 울었고 그 소리를 듣자 밖으로 튀어나가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그런 연약하고 죄에 찌든 모습을 보일 줄을 미리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만찬 때는 물론 부활 후에도 아무 꾸중도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어보고 용서해주시면서 큰 소명을 맡겼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제자들이 현실 삶에서 범사에 항상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또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르신 이것은 최후의 만찬에서 다시 가르치신 복음과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너희가 순교까지 당하는 극심한 환난을 당해도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한 은혜 안에 들어왔기에 성령을 받아서 담대해질 것이며 그럼 너희에게 평안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위로한 것입니다.

신자는 빛의 자녀가 이미 되었고 다시는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분과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의 내주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확증으로 그 영광은 전혀 수정 취소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정말로 그 영광을 확신하고 있다면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거룩한 소망을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하면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신자가 사람들로부터 능욕을 받고 일상 삶에서 현실적 피해를 입는 것은 부활의 영광으로 가는 필연적인 여정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에 타고 맹수에게 죽는 것은 크게 고통스러웠으며 그 일 자체를 감사한 것이 아니라 소망을 놓지 않고 그 고통을 인내하고 연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로 인해 일어나는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기 본문도 일차적으로 종말공동체에 주는 말씀으로 그런 상황이라면 예수님을 위하는 일 말고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살펴본 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정확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빼고 따지면 세상의 상식, 윤리, 철학,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그 전에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는 역할을 하는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해서 정확한 해석도 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신자의 믿음의 출발과 결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종교적 경건 혹은 훈련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태초부터 영원까지 오직 골고다 십자가에 드러난 당신의 긍휼과 권능으로만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

신자는 바울처럼 자신이 아직도 얼마나 연약하고 죄에 수시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사망의 몸인 줄 절감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긍휼만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서 걸어가신 그 삶의 족적대로 따라가고 있다면 세상에서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참된 기쁨과 자유와 평강을 생생히 누릴 수 있습니다. 신자는 범사에 억지로 감사하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잠언의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신자는 고난이 닥치면 언제라도 괴로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부짖으며 탄원하거나 심지어 의심 불평 원망 분노를 실컷 터뜨려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행한 일이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대하듯이 다 받아주십니다. 또 신자들더러 바로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범사를 감사하기 보다는 범사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십시오. 아니 신자의 삶이 바로 주님께 받은 소명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에겐 범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니까 얼마든지 인내하고 연단하며 소망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서 환난 중에도 육신은 힘들어도 영혼은 천국 보좌에 게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께 받은 현실적 축복만 헤아리지 마십시오.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최선을 다했는지 되돌아보면서 올해를 마감하십시오. 만약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지 겸허히 또 세밀히 살피면서 내년을 준비하십시오. (끝)

2021/12/5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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