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유주의의 발호와 핵심내용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18세기 후반부터 유럽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의 여파로 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쳐 대변혁이 일어났다. 그러자 학문 자체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들이 증가했다. 특히 대학에서는 새로운 학문 방법들이 개발되고 진보된 문명의 시대를 주도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른바 ‘계몽(啓蒙)주의’(the Enlightment)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계몽주의는 자연스럽게 합리주의와 이성 중심의 철학적 사고를 낳았다. 이 철학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적 세계관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인간의 이성 밖에 존재하는 모든 사유(思惟)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19세기에 들자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즉각 쌍둥이라 할 수 있는 자연주의를 낳았다. 자연주의는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주의는 먼저 성경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성경에 대한 고등 비평을 시작으로 기독교와 관련한 거의 모든 것으로 공격의 전선을 확대시켰다. 특히 자연주의는 과학적 사고의 발전과 함께 더욱 기승을 부렸다. 여기에 다윈의 ‘종(種)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1859)은 자연주의적 철학적 사고에 기름을 끼얹은 듯했다. 자연주의자들은 이제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큰소리쳤다. 성경의 창세기는 다시 써야 한다고 조롱했다. 자연주의는 잠을 자고 있던 기독교 신학에 갑자기 달려들어 정면으로 부딪쳤다. 두 진영 사이에 거대한 충돌(huge clash)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여파로 사람들이 점점 기독교회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의 공격으로 교회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교회가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점점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과학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들은 성경이 고수하는 진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자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회의가 일었고 기독교에 대한 만족감이 현저히 감소되었으며 교회는 보수적 사고와 진보적 사고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호’의 항해에 가장 높고 위험한 파고가 들이닥친 것이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인간의 이성주의와 낙관주의, 그리고 과학주의적인 철학적 사고와 학문으로부터 기독교를 구하고자 나선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독일의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다. 그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세상 풍조에 맞서 종교의 본질을 논함으로써 기독교를 방어하고자 했다. 기독교에 대한 철학적 회의주의를 강하게 반대했다. 대신에 그는 종교는 형이상학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며 또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은 종교라는 독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를 직관(直觀, Intuition)과 감정의 영역으로 설명했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경험과 느낌에 두었다. 특히 신 의식(God consciousness)에 대한 느낌과 이 의식의 당연한 귀결인 절대 의존감에 두었다. 그런데 슐라이어마허가 시도한 신학의 내면화는 기독교의 심각한 타락을 야기시켰다. 결국 외적 권위를 거부하고 신학을 경험과 내적 느낌에 정초시키어 오히려 기독교 신학이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로 달려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결과를 낳았고, 기독교가 계시의 종교가 아니라 불확실한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종교가 됨으로서 세계 여러 종교들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연구가 되었다. 이것이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의 실체이다. 순수한 열정과 동기를 싣고 떠난 그의 배가 정박한 곳은 불행히도 하나님 나라의 항구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충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자연주의를 배격하고자 인간의 내면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자유주의 신학의 금자탑은 슐라이어마허의 충실한 제자인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이 쌓았다. 그로 인해 자유주의 신학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프로이센의 루터교 목사의 아들인 리츨은 1864년부터 1889년 죽을 때까지 괴팅겐에서 가르치며 독일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리츨 신학의 전형적인 특성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형이상학적 요소 즉, 초자연주의적 요소를 제거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도덕적 성격을 강조하고 인간 이성을 넘어서는 문제들에 대해 거부의 손짓을 했던 칸트의 철학과 인간의 내면적 경험에 정초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크게 영향을 받은 리츨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한 도덕적 모범과 가치관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를 지구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윤리와 도덕의 종교로 만들어내었다. 리츨에게 종교란 이 땅의 삶에 대한 것이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인데 리츨의 하나님 나라는 이상적인 도덕과 윤리를 목표로 하는 세계였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도 아니고 구속주도 아니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이 땅에 오시어 인류를 심판하실 초자연적인 주님도 아니었다. 리츨은 정통 신학이 만들어낸 초자연적인 교리들을 전면 거부했다. 교리야말로 참 신앙과 본질적 기독교에 대한 방해물로 간주했다. 그는 교리는 기독교를 초자연주의적 세계로 끌고 가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철학의 산물로 보고 하나님 나라는 교리 없는 세계라고 설파했다. <계속>

최더함(Th. D, 역사신학, 바로선개혁교회)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email protected]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