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워필드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벤자민 브레킨리지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와 함께 3대 칼빈주의자로 불린다. 동시대를 살았던 세 사람은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고 학문적으로 칼빈주의(Calvinism)라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빛나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워필드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칼빈 이후 모든 신학자들을 다 모아도 워필드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극찬한다. 워필드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프란시스 패튼(Francis L. Patten, 1843~1932)은 워필드를 평하기를 “탁월하되, 독보적으로 탁월한 학자이며 책에 둘러싸여 산 사람”이라 했다. 프린스턴 신학교로 워필드가 청빙한 탁월한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도 워필드의 높고도 깊은 학식과 인품을 존경한 나머지 워필드가 쓰러지는 날까지 그와 산책하며 교제를 나누었다.

워필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임에 틀림없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8세기 유럽에서 태동한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에서 출발한 자유주의 신학의 파고가 미 대륙을 완전히 뒤덮었던 때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미국의 대학들을 먼저 선점해 갔다. 1805년에 이르자 하버드대학이 유니테리언(Uniterian) 교수를 임용함으로서 탈선에 앞장섰고, 회중교회들은 엔도버 신학교를 세웠다. 이에 당시까지 신학교를 구비하지 못했던 미국의 장로교가 자극을 받아 신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했고 드디어 1812년 8월에 지금의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후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에 침투한 자유주의 신학을 방어하는 강력한 방파제 역할을 감당했다. 설립 이후 100년 동안 칼빈주의로 무장한 교수들이 즐비했고,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프린스턴 교수들의 가르침과 학문적 성과에 엄청난 영향을 받아 세계 곳곳에 칼빈주의를 실어 나르는 첨병 역할을 했다. 1912년 5월에 개최된 프린스턴 신학교 100주년 기념식에 참가한 전 세계 기독교단체들의 대표들과 신학자 목회자들은 프린스턴의 경건과 학문, 그리고 수준 높은 강의와 저술에 찬사를 보냈다. 구(舊) 프린스턴의 교수와 신학자들과 저술가들의 신학적 예리함과 철저함은 개혁파 정통주의를 더 높은 수준의 단계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거의 모든 방면에서 합리주의가 득세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부패 같은 개념들에 대한 반대가 팽배한 가운데서 구 프린스턴의 존재는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자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역사학자 마크 놀(Mark. A. Noll)은 프린스턴 신학을 ‘고전적 개혁주의 신앙의 19세기적 미국적 표현’이라 했다. 다시 말해 구 프린스턴은 기독교 신앙의 영속화에 주력했지만 신학 방법론과 사상의 체계화 및 시대적 적용이라는 차원에서는 미국 문화와 관련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것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워필드 신학은 바로 이런 구(舊) 프린스턴 신학과 절대적으로 연관이 깊다. 사가(史家)들은 워필드야말로 구 프린스턴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의 제자인 메이첸(J. Gresham Machen, 1881~1937)이 워필드의 장례식장에서 “워필드의 관(棺)과 함께 구 프린스턴의 신학도 사라졌다”고 말할 만큼 워필드 신학은 구 프린스턴 신학에서 거의 절대적이었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 1823~1886)의 손자이자 20년 동안 워필드의 조교였으며, 워필드 이후 그의 교수직을 물려받은 핫지 주니어(Casper Wistar Hodge. J, 1870~1937)는 “워필드는 학식 부분에서는 이전의 모든 조직신학자들을 능가했고, 적어도 영어권에서 워필드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과연 무엇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과 지금 이 시대의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워필드의 신학을 이렇게까지 칭송하고 높이 평가하는가? 과연 워필드의 신학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 혹은 교훈들이 무엇인가? 어떤 차원에서 우리가 워필드 신학을 오늘에 조명해야 하는가? 이를 알기 위해 우선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18세기 후반으로 여행해야 한다. <계속>

최더함(Th. D, 역사신학, 바로선개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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